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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만 듣고 "저 검사·은행원 모두 피싱범"…AI 나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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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압수한 보이스피싱 범행에 이용된 스마트폰. 사진 은평경찰서

경찰이 압수한 보이스피싱 범행에 이용된 스마트폰. 사진 은평경찰서

“국제마약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검찰로 출두하세요.”

A씨(34)는 서울OO지검 수사관을 사칭한 사기범으로부터 이와 같은 연락을 받았다. 그가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을 의심하자, 사기범은 “대검찰청 홈페이지에서 영장을 확인하라”며 A씨를 속였다.

A씨가 사기범이 보낸 링크에서 본인 성명·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자 (가짜) 영장 발부 내용이 떴다. 그는 “안전(?)하게 금융감독원으로 이체하라”는 안내에 따라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한 인물 계좌로 수억원을 보냈다. “자금 출처를 확인한 후 곧 환급된다”는 안내와 달리 연락이 두절되자 A씨는 은행에 지급정지를 신청했다. 하지만 이미 전액 현금으로 인출된 뒤였다.

금융감독원이 2020년 공개한 실제 보이스피싱 피해 사례다. 갈수록 조직화하는 보이스피싱 범행을 단속하기 위해 정부가 나섰다. 행정안전부는 22일 “전화사기 검거에 초점을 맞춘 ‘보이스피싱 음성분석 모델(보이스피싱 모델)’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행안부, 보이스피싱 음성데이터 분석모델 개발

연도별 보이스피싱 범죄 건수와 피해 금액. 그래픽 차준홍 기자

연도별 보이스피싱 범죄 건수와 피해 금액. 그래픽 차준홍 기자

인공지능(AI) 학습(딥러닝) 기술을 활용한 보이스피싱 모델은 행안부 통합데이터분석센터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이 협업해 개발했다. 보이스피싱 사기범의 음성을 감정하는 음성분석 모델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 모델은 러시아·영국 모델을 활용해 개발, 한국어를 사용하는 범죄자를 판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한다.

정부는 6000여 명으로부터 추출한 100만개 이상 음성데이터를 활용해 AI를 학습시켰다. 특히 일반인 음성데이터 10만여개와 국과수가 보유한 실제 보이스피싱 사기범 음성데이터를 함께 사용해 알고리즘을 구현했다.

덕분에 기존 모델보다 사기범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다고 정부는 설명했다. 김철 행안부 통합데이터분석센터장은 “정확도 검증 테스트에서 범죄자 음성을 판별해내는 판독률이 기존 외국산 분석모델보다 77% 향상했다”고 했다. 범죄자 음성 100개를 감정하면 기존 모델이 28.7개 정도만 판별하는데, 새로운 모델은 51개까지 구분했다는 뜻이다.

이 기술은 보이스피싱 범죄자의 여죄를 캐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범죄자 목소리가 기존에 보유한 미해결 범죄 데이터베이스 목소리와 어느 정도 동일한지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범죄조직 군집화 기능 세계 최초 구현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이 보이스피싱 조직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범죄에 사용된 압수품을 공개하고 있다. 뉴스1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이 보이스피싱 조직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범죄에 사용된 압수품을 공개하고 있다. 뉴스1

또 기존 모델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범죄가담자 그룹화 기능도 구현했다. 범죄자 그룹화는 사건별로 범죄자 목소리를 비교해 동일인 여부를 확인하고, 이를 집단으로 묶는 기능이다.

통상 보이스피싱 조직은 여러 명이 조를 지어 범행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A씨 사례처럼 범죄자들은 검찰·금융감독원·은행 등 각각 역할을 분담해 조직적으로 활동한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보이스피싱 모델은 사기범 목소리를 개별적으로 구분했을 뿐, 그룹별로 묶어 관리하진 못했다. 이번에 정부가 만든 모델은 보이스피싱 데이터베이스에서 확보한 음성과 유사한 음성을 묶어, 같은 사건에 연루한 범죄자들을 단일 사기범 집단으로 그룹화할 수 있다.

김철 센터장은 “그룹화 기능을 활용하면, 그룹 지어 활동하는 범죄자 중 한 명만 잡아도, 취조 과정에서 나머지 범죄자를 검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보이스피싱 이미지. 중앙포토

보이스피싱 이미지. 중앙포토

새로운 보이스피싱 모델은 이달 말부터 사기범 수사에 투입한다. 또 기존에 검거한 사기범 여죄를 추궁하는 데도 활용하기로 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보이스피싱 범죄 15만6294건(피해액 3조620억원)이 발생했다. 한창섭 행정안전부 차관은 “이 기술을 개발도상국 등 최신 음성 과학수사 기법 활용을 원하는 국가에 보급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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