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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의 ESG 인사이트] 느린 낙타가 사막을 건넌다

중앙일보

입력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어느 빌딩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서울 핵심지역 역세권에 위치해 가시성과 접근성이 뛰어난 이 빌딩은 1978년 한 건설회사의 사옥으로 지어져 오랜 기간 서울의 랜드마크 건물로 불리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이 건물의 수난사(受難史)가 시작됐다. 당시 자금난을 겪었던 건설사는 사옥을 해외 리츠펀드에 매각했고, 이후 그 빌딩은 몇몇 국내 중견기업과 연기금을 거쳐 2020년에는 부동산 전문 자산운용사 컨소시엄(이하 ‘부동산펀드’)의 소유가 됐다.

부동산펀드는 인수 후 대대적 건물 가치 제고 작업에 들어갔다. 빌딩 곳곳을 개·보수했고, 시 당국에 건물 증축 인허가 신청을 냈다. 건물 관리의 여러 기능은 외주 업체들에 맡겨져 분절화됐다. 주차시설은 주차대행 업체가, 청소나 경비 업무 등은 각기 다른 용역 업체가 맡았다. 이를 통해 건물관리 총비용은 절감됐지만 각 기능 간 유기적 협력이 안 돼 입주사들의 불편은 늘었다. 외주업체들의 자사 편익 추구는 입주사들 불편과 불이익으로 둔갑했다.

예컨대 건물 주차대행 업체는 역세권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외부인을 대상으로 주차장 영업을 한다. 인근 주차장에 비해 주차요금을 낮게 책정해 정기주차 고객들을 모집한다. 결과적으로 수용 가능한 차량 대수를 초과한 모객으로 인해, 되레 건물 입주사 직원들이 주차를 못 하는 상황도 발생하곤 한다. 주객전도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이러한 부동산펀드의 빌딩 리스트럭처링(Restructuring) 계획과 일정들이 입주사들에 투명하게 공유되지 않았다. 이러한 영문도 모른 채 상당수 입주사는 이 빌딩과 5년 장기 임대계약을 맺고 입주했다.

마침내, 투자한 지 2년여 만인 작년 3월 부동산펀드는 서울시로부터 증축 허가를 받아 냈다. 증축이 완료되면 용적률이 현재 760%에서 1000%로 상향됨으로써 연면적은 30% 늘어난다. 건물 사이즈가 커지면 그만큼 창출 가능한 현금 유입도 커지고, 건물 가격도 뛸 것이다. 건물의 임대 수입과 매각 차익이 상승하기 때문이다. 이 펀드에 자금을 댄 투자자들의 기대 수익률도 높아질 것이다.

증축 허가를 받은 이후 부동산펀드는 증축 공사 돌입을 위한 사전 작업에 들어갔다. 지하 1층 구내식당과 제과점, 1층 커피전문점, 편의점 등을 내보냈다. 한편 3년 예정의 증축 공사 계획에 따르면 기존 옥외 주차장 자리에 건물을 신축하게 돼 있다. 현재의 지하 1·2층 주차장도 3년 동안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입주자들은 3년 동안 편의시설도 없고, 건물 내 주차장도 이용하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공사 소음과 먼지마저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건물 내 저간의 사정과 무관하게 현재까지 부동산펀드 투자자들은 행복하다. 하지만 세상일에는 공짜가 없는 법, 일방이 이득을 취하는 순간 누군가는 그 비용을 부담한다. 앞서 언급했듯 이 건물의 경우, 그 비용과 불편부당, 불이익은 고스란히 건물의 주요한 이해관계자들인 입주자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이 건물 사례는 펀드 자본주의 혹은 주주(투자자) 자본주의 문제점을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즉 펀드 자본주의의 투자 시계(視界)는 대개 3~5년이다. 이 기간에 펀드는 투입 대비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유인을 갖는다. 그 과정에서 ‘ESG’로 대표되는 외부 효과(Externality)나 투자자 이외의 이해 관계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등은 간과되기 쉽다. 외부성은 객관적으로 계량화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시되거나, 그것들을 고려하면서 위의 제한된 투자 기간 동안 펀드의 내부수익률(Internal rate of return)을 극대화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따라서 펀드는 단기 효율성과 단기 생산성 극대화를 위해 투자 대상에 대한 다음의 조치를 취한다. 비용 절감을 위한 외주화와 재외주화, 그로 인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외주업체들의 셀프 이익 추구, 아울러 건물 증축 작업 돌입 등이다. 하지만 앞서의 건물 사례에서 봤듯이, 이 과정에서 입주사들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편의시설 부재, 주차 불편, 통행 제한, 각종 소음 및 먼지 감수 등 허다한 불편이 발생하지만 대개 무시된다. 펀드는 그들이 고용한 빌딩 관리자의 뒤에 숨어 입주자들의 항의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입주사 각각이 부담하는 위의 총불편과 총비용들을 재무적 수치로 환산해 부동산펀드에게 다시 청구하면 어떻게 될까. 즉 펀드가 외부화한(Externalized) 총비용을 펀드에게 재청구(Internalized)하면 당연히 펀드의 내부수익률은 떨어질 것이다.

만일 입주사들이 소송을 제기하면 또 어떻게 될까. 만일 건물 증축 작업 중지에 대한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면 어떻게 될까. 의당 부동산펀드의 법률 자문 비용이 늘어나고, 건물 신·증축 공사가 연기될수록 그만큼 투자 수익률은 떨어질 것이다.

앞서 문제점들은 비단 빌딩 투자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펀드가 바이아웃(buyout)했거나 행동주의로 투자 전략화한 기업의 경우에서도 위와 유사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투자 개념과 전략이 ESG 투자다. ESG 투자는 펀드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주주(투자자) 이기성과 단기성 문제에서 비롯되는 외부화, 이해 관계자 이익 침해의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개선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ESG 투자자들은 주주만 아니라 이해 관계자들 이익도 함께 고려한다.

저명한 미래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제러미 리프킨은 최근작 『회복력 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과 산업자본주의는 효율성과 생산성에 대한 집착으로 회복 탄력성을 약화시켰다. 예컨대 농업의 생산성 극대화 과정에서 살충제, 화학 비료 사용이 급증했으나 결과적으로 토양은 심각하게 황폐해져 복원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또 다른 예로, 신자유주의 등장 이후 글로벌 밸류체인이 확산되고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지만, 미증유의 팬데믹과 전쟁 발발로 인해 공급망 문제가 발생하면서 공급 차질 및 인플레이션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약이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펀드 역시 이러한 단기 효율성 논리에 지배된다. 제한된 기간 동안의 투자 수익 극대화를 위해 투자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직진 우상향’ 드라이브를 건다. 하지만 건물이든 기업이든 그것의 진정한 가치 제고 작업은 진공 속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그 작업 공간에는 복잡다단한 변수들이 존재하고 예측은 어려우며 이해 관계는 갈수록 첨예하다.

빌딩의 경우 자칫 입주사들이 반기를 들 수 있다. 소음, 먼지, 편의시설 부재의 사무공간을 이용하느니 차라리 임대차 계약을 끊고 재택근무로 돌릴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이든 건물이든 모든 경영은 내·외부적 환경, 거시경제 지표, 경쟁 양상, 기술 변화, 게임 체인지, 제품개발 속도, 이해 관계자 저항 등의 변수도 입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때로 성장보다 후퇴를 택해야 할 때도 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도, 일정 기간의 정체와 휴식도 필요하다.

경영과 투자를 일컬어 ‘마라톤 레이스’라고도 말한다. 마라톤에서 42㎞를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선수들은 없다. 그렇다면 도중하차할 것이다. 선수는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뒤처져 달려간다. 이 모두가 장거리 레이스 전략이다.

하지만 골인 지점에 대한 목표의식만은 결코 놓지 않는다. 사막을 횡단하는 동물은 치타도 말도 아니다. 느린 낙타가 사막을 건넌다. 경영도 투자도 마라톤과 낙타에서 레슨을 얻어야 한다. 경기 후퇴와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요즘 투자자와 경영자가 깊이 새길 금언 중 금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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