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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해빙과 신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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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봄이 멀지 않은 듯하다. 우수가 막 지났다. 눈이 비가 되어 내리고, 남아 있던 눈과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어 흐르는 때가 되었다. 풀과 나무에도 싹이 틀 때가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제주에는 대지에 푸릇한 기운이 점차 돈다. 아직은 바람에 차가운 기운이 있지만, 낮에 햇볕이 들면 잠깐씩 포근한 느낌이 든다. 몸에 도톰한 것을 껴입지 않아도 바깥은 따스하고 편안하다. 눈보라가 혹독하게 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변화의 징조가 있다.

마당가에 한동안 얼어있던 수도꼭지에서는 맑은 물이 쏟아진다. 산에 들어서면 골짜기에는 아주 작은 물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에서 듣더라도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만들어내는 물소리는 봄의 소리 같다. 나는 졸시 ‘삼월’에서 ‘얼음덩어리는 물이 되어가네/ 아주아주 얇아지네// 잔물결에서 하모니카 소리가 나네’라며 이즈음부터 듣게 되는 물소리에 대한 느낌을 표현한 적이 있다. 해빙(解氷)한 물은 마치 하모니카 소리처럼 줄줄이 오목하고 볼록하게 모양과 소리를 이루며 흘러 아래로 간다.

얼음이 물이 되어 흐르는 때 맞아
조용하고 포근하고 탄력적인 봄
우리 내면도 부드럽게 변했으면

동네의 밭에서도 일 나온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밭에 거름을 내는 집도 있고, 제주에는 풀이 일찍 돋아 벌써 풀을 한 차례 뽑는 집도 있다. 나도 작은 밭의 두렁을 깎고, 밭에 골을 타서 무엇이든 심을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화단에 나 있는 풀을 매기도 했는데, 풀을 매다 보니 화단 곳곳에 작년에 심은 튤립의 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구근을 심으면 그 구근에는 틀림없이 움이 트고, 또 그 구근을 한날에 심었다면 움이 트는 시기 또한 틀림없이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어떤 일에든 내가 원인을 만들면 그로 인한 결과도 제때에 내가 받게 된다는 것을 한 번 더 깨달았다.

얼마 전에는 옆집 할머니께서 냉이를 캤다며 갖다 주셔서 나도 내 집 텃밭에서 자란 봄동 몇 포기를 전해 드렸다. 한 움큼의 봄 향기를 주고받았다. 저녁에 냉이를 넣고 된장국을 끓여내니 식탁에 이른 봄의 냄새가 가득했다. 양지바른 언덕에 쪼그려 앉아 호미로 냉이를 캤을 할머니를 떠올리니 고마운 생각이 짙어졌다.

집 주변 밭에는 벌써 유채꽃이 피었다. 노란 유채꽃 무더기는 마음을 화사하게 했다. ‘유채꽃’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은 중국의 시인 텐허 생각도 났다. 텐허는 ‘들판을 메운 청아한 유채꽃이여/ 나는 그 한복판에 서서 입을 크게 벌리고 호흡한다’라고 썼다. 물결치는 유채꽃밭을 한 번의 큰 호흡으로 다 품을 수는 없겠지만, 신선한 생명의 곱고 밝은 생명력을 마음에 한가득 채우고 싶은 의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텐허의 시편들을 다시 읽어보니 그의 작품들에는 봄에 관한 멋진 시구가 참 많았다. 봄을 맞아 나무 심기를 하며 ‘회색 솜옷을 입은 노인들’께 ‘지나가는 봄바람을 국자로 한 번 또 한 번 떠먹여 주리라’라고 적었고, 삼월이 오면 ‘남쪽으로 난 경사지에/ 보리밭이 차츰 드러난다’라며 봄의 서정을 읊기도 했다. 봄볕이 잘 드는 남쪽 보리밭은 채광이 더 좋을 테니 시간이 지나면서 보리가 먼저 푸르스름한 빛깔을 띨 것이다. 복숭아 농사를 짓는 마을에서는 봄이 되면 복숭아꽃이 만발하되 ‘자그마한 복숭아꽃은 태어나자마자 웃음을 배운다’라며 개화의 기쁨 자체를 노래했다. 신춘(新春)의 흥취를 아주 감각적으로 드러낸 시구들이었다.

봄의 도래와 그 징후를 정밀한 문장으로 쓴 작가로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그는 개간되지 않은 숲과 초지야말로 우리 삶의 강장제라면서 이런 곳들이 없다면 우리 삶에 활기 또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봄 마중을 하게 되는 이즈음의 시간을 “폭풍 치는 겨울날에서 조용하고 포근한 날씨로의 변화, 또 어둡고 굼뜨던 시간에서 밝고 탄력적인 시간으로의 변화”를 만물이 선언하는 때라고 했다.

농가에서는 한 해 농사를 위한 준비를 하고, 그리하여 씨앗을 고르는 때이다. 반면에 논과 밭, 숲과 초지는 겨울로부터 빠져나와 부드러운 변화를 보이는 때이다. 소로는 “겨울의 독기와 더부룩한 기분”을 씻어내는 때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때를 사는 우리도 계절의 변화, 자연의 변화를 보고 겪으면서 마음의 변화를 함께 생각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 내 마음의 씨앗에 대해 생각하고, 내 마음의 산뜻한 움틈에 대해 생각하고, 내 마음의 볕 바른 곳을 생각하고, 차고 딱딱한 얼음이 내 마음에서 해빙하는 것을 느끼고, 내 마음이 물처럼 흘러가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도 좋을 것이다. 지금 자연은 새봄을 맞이하고 있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