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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장 성과 최악, 해고하세요” AI가 인사도 좌지우지 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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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다가온 인공지능 시대

다가온 인공지능 시대

바야흐로 인공지능(AI)의 시대. 인간처럼 대화하는 챗GPT를 필두로 교육·법률·의료·행정 서비스 등에서 빠르게 생성형 AI 도입이 확산하는 가운데 평가·승진·해고 등 직장 내 인사 문제까지 AI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미 채용 및 직무 매칭 등에서 인사 데이터베이스(DB) 활용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이를 넘어서 개인의 ‘일자리 살생부’를 AI에 일임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다.

2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달 구글에서 정리해고된 직원 1만2000명 중 수백 명이 단체 채팅방에서 ‘회사의 갑작스러운 감원’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다 해고자 명단을 경영진이 아닌 AI가 추출했을 것이란 주장이 나왔다고 전했다. 해당 채팅방에선 사측이 ‘어떠한 법률도 위반하지 않도록 섬세하게 설계된 알고리즘’이 정한 커트라인에 따라 해고자를 골라냈을 거란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앞서 구글이 대량 해고 사유로 경기 침체 등을 거론하자 노동조합은 최근까지의 실적으로 볼 때 해고 명분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한 바 있다.

미국 인사담당 98% “해고 때 AI 활용할 것”

구글은 즉각 “어떤 알고리즘도 개입된 바 없다”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해고 커트라인은 따로 공개하지 않았다. WP는 이번 논란이 “알고리즘이 사람의 일자리를 박탈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고용주는 해고 사유를 어느 선까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전 구글 직원들의 주장에 대해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고 밝혔다. 이미 AI가 기업의 채용, 직무 매칭, 승진 등 인사 전반에 활용되고 있으며 ‘최적의 직원’ ‘고성과자’를 골라내는 현재의 시스템을 역으로 이용하면 해고자 명단을 작성하는 게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달 소프트웨어 평가 사이트인 캡테라가 미국 기업의 인사담당자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응답자의 98%가 올해 직원 해고를 결정할 때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을 활용할 것이라고 답했다.

캡테라의 시니어 분석가인 브레인 웨스트폴은 “정리해고와 같은 까다로운 결정을 내릴 때 인사 관리자는 심리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때 알고리즘에 의존하면 중압감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다”고 풀이했다.

한국에서는 일부 대기업이 입사자 서류전형이나 사전 면접에 AI를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직무 매칭에 AI를 활용하기도 한다. 한국질병예측연구소는 연구원 정보 DB를 구축해 놓고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가 나올 때마다 AI로 최적의 연구원을 추천받아 팀을 꾸린다. 그러나 아직까지 AI를 직원 고과나 해고에 활용하는 국내 기업은 없다고 한다.

“한국 기업문화서 AI 평가는 시기상조”

무엇보다 미국과 기업·조직 문화가 다른 한국에선 AI가 개별 평가에 응용되는 게 시기상조로 평가된다. 익명을 요구한 기업 관계자는 “개인 역량이 뛰어난 직원도 소속된 회사·부문·본부·팀에 따라 전혀 다른 점수를 받을 수 있다”며 “한국식 평가 구조에 알고리즘을 도입하는 건 아직까진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AI를 활용해 인사담당자가 책임을 전가하는 이슈는 민감할 수 있다. 이경전 경희대 경영대 교수는 “인사관리처럼 예민한 문제를 알고리즘에 의지할 경우 이를 조정할지, 말지에 대한 최종 결정과 그에 대한 책임은 인간 관리자의 몫”이라면서 “잘못된 결과까지 ‘알고리즘에 따랐을 뿐’이라고 얘기하는 건 어떤 상황에서든 핑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인사관리자가 책임을 알고리즘에 떠넘길 가능성에 대한 경고다.

법정 다툼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 미국의 인사노무 관련 전문 변호사인 잭 봄배치는 “인사관리에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리더가 누구를 잘라낼지에 대한 결정을 AI에 단독으로 맡길 경우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며 “알고리즘이 성별·인종·나이에 따라 편향된 결과를 도출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관리할 법적 의무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실제 한국도 관련 법안 개정이 진행 중이다. 국회에 제출된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에 담긴 ‘자동화 의사결정’은 인사와 같은 중대한 의사결정이 알고리즘 등에 의해 ‘자동 처리’됐을 때 처리 정지나 재처리를 요청하거나 고용주에게 설명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일각에선 직장문화 개선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은 “제대로 인사관리를 하려면 다양한 정보가 필요한데 지금까진 담당자의 직관에 의존해 왔다”며 “AI를 활용하면 손쉽게 객관적 데이터를 얻을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좀 더 합당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챗GPT가 미국 교육 현장에서 누군가에겐 커닝 도우미로, 다른 이에겐 창의력을 배가시키는 교구로 쓰이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오 소장은 “인사관리 AI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과를 높이고 합리적인 직장문화 개선을 이끌 수 있다”며 “결국 AI를 잘 쓰는 인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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