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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한 후계자 되는 데 나이는 걸림돌 아니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9일 조선인민군 창건일(건군절) 75주년을 맞아 지난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야간 열병식을 개최했다고 보도했다. 열병식에는 김 총비서가 딸인 김주애와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참석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9일 조선인민군 창건일(건군절) 75주년을 맞아 지난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야간 열병식을 개최했다고 보도했다. 열병식에는 김 총비서가 딸인 김주애와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참석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지난 2월 8일은 북한 건군절이었다. 올해로 75주년이다. 그날 주인공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아니었다. 그의 딸 김주애(10)였다. 김주애가 화제가 된 것은 김정은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다. 김정은이 행사장 레드카펫 위를 김주애의 손을 잡고 걸었다. 부인 이설주는 한 걸음 뒤를 따라갔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공식 행사장에 겨우 열살 된 딸을 데리고 레드카펫을 밟은 건 처음이다.

하루 전 연회장에서는 더 놀라웠다. 김주애가 김정은 부부의 사이에 앉고 뒤에는 조선인민군 실세인 군 총참모장‧국방상‧총정치국장이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주인공은 김주애였다. 이 배려는 김정은이 ‘딸 바보’라고 하기에 과할 정도였다. 북한 언론은 김주애에 대해 ‘존경하는 자제분’이라는 극존칭을 사용했다. 이렇다 보니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 김주애가 김정은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여기에 김정은의 건강 이상설까지 보태져 여러 가지 소문이 증폭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 10세인 김주애가 후계자라니 가당치 않다는 목소리도 크다. 김정은과 김정일의 후계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것은 2009년 1월이다. 그의 나이 25세. 아버지 김정일이 2008년 8월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다. 그리고 2년 뒤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 12월에 최고지도자가 됐다. 권력 승계 기간이 고작 2년 11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아버지 김정일은 어떤가? 그는 1974년 2월 32세 나이에 후계자로 내정됐다. 권력 승계 기간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7월까지 무려 20년 5개월이 걸렸다. 김정은에 비하면 오랜 기간이다. 권력 승계 기간을 비교하면 김정은은 ‘속성’으로 최고지도자에 오른 셈이다.

김주애가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해 11월부터다. 신형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7형 발사장에서 김정은이 김주애의 손을 잡고 걷는 장면이 공개되면서다. 이때부터 김주애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김주애의 등장은 바로 후계자 문제로 연결됐다.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건강 이상설과 연관시키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대목이 있다. 북한에서 과연 후계자의 나이가 문제가 되느냐다. 김정은은 아버지의 건강 탓에 갑자기 후계자가 됐지만, 김정일은 후계자가 되는 과정에서 나이가 문제가 됐다. 김일성은 “김정일이 아직 너무 어리다”며 항일 빨치산 원로들의 제안을 한사코 반대했다. 김일성은 “두고 보자”면서 보류했다.

김일성을 설득한 사람은 그의 ‘오른팔’로 불리는 김일 내각 총리였다. 1974년 2월 열린 조선노동당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다. 김일이 앞장선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일의 본명은 박덕산이다. 김일성이 해방 직후 자신의 이름에서 두 자를 내어 김일이라고 지어 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김일은 “‘김’ 자는 수령님을 언제나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뜻이고, ‘일’ 자는 한일자인데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김일’이라는 이름을 한평생 오직 수령님 한 분밖에 모르는 혁명 전사로서 신념의 표시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김일성과 김일은 그런 사이였다.

그런 김일이 “수령님, (김정일이) 아직 너무 젊다고 말씀하시지만 젊고 젊지 않은 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혁명의 운명과 관련되고 그 장래에 대한 문제이니 수령님께서 고쳐 생각해주시기 바란다”고 설득했다. ‘나이 탓’을 하며 버티던 김일성도 차마 김일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버티면 버틸 수 있었지만, 김일성도 김일의 설득이 맞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때부터 후계자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제야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후계자로 내정됐다.

김일이 제안하고 김일성이 받아들인 데는 중국 상황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바로 1971년 9월 린뱌오 사건이다. 린뱌오는 1969년 4월 제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통해 당규약에 ‘마오쩌둥 동지의 친밀한 전우이자 후계자’라고 명문화된 사람이다. 이런 명문화는 국제공산주의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다 실패해 공군기로 도망가다가 몽골에서 추락사했다.

이 사건은 김일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린뱌오는 마오쩌둥 개인 숭배 운동을 주도하고 마오쩌둥을 위대한 수령으로 찬미했던 사람이다. 김일성은 린뱌오 사건을 통해 후계자의 배신을 철저히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후계자의 제1 덕목은 당연히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성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린뱌오 사건이 터진 해에 김일성은 59세로 젊었다. 그런데 고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목 뒤에 생긴 혹이 서서히 커지면서 건강도 신경이 쓰였다.

린뱌오 사건 이후 김일성이 후계자를 정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일이 또 중국에서 발생했다. 38세의 왕훙원이 1973년 8월 중국공산당 제1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 부주석과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서 후계자 지위에 올랐다. 중국에서 30대 후계자가 등장한 것이다. 30대 초반의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는 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항일 빨치산 원로들도 ‘제2의 린뱌오’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김정일 후계자를 서둘렀다.

왕훙원이 후계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정일은 1973년 9월 조선노동당 제5기 제7차 전원회의에서 조직‧선전 담당 비서에 선출됐다. 조선노동당 핵심 자리 2개를 차지함으로써 당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974년 2월에 드디어 후계자가 됐다.

하지만 공표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김정일이 항일혁명을 한 것도 아니고 북한 건설 과정에서 큰 공헌을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될 수 있느냐는 인식이 북한 주민들에게 있었다. 김정은은 1974년 2월 후계자로 정해진 뒤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 대내외에 천명됐다.

김주애가 후계자로 내정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정되고 공개된 데는 6년 8개월이 걸렸다. 김정은은 2009년 1월에 후계자로 내정되고 2010년 9월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면서 공식화했다. 후계자로 공식화되는데 1년 8개월. 만약 김주애가 후계자라면 공식화되는데 할아버지-아버지 사례처럼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부자세습이 아닌 부녀세습이 되는 북한 최초의 사례가 만들어지려나.

김주애가 후계자가 되는데 나이는 걸림돌이 아니다. 북한은 김씨의 누군가가 최고지도자가 되면 그를 떠받치는 조선노동당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다. 김일성‧김정일 사망 이후 등장한 북한 붕괴론이 유행가처럼 흘러 지나가는 것도 이런 이유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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