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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갑마장에서 기마군단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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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올 게 왔다. 요즘 화두가 된 챗GPT를 구동하자 떠오른 첫 문장이었다. 두려움과 신비함이 한꺼번에 닥쳤다. 판단과 의지, 신중함이 살짝 묻은 답변을 쏟아놓는 이 새로운 존재가 마치 영화 ‘Her’처럼 당장 내일이라도 나를 휘감을 수 있다. 가상현실과 아바타가 이제 내 손바닥에 올라왔다. 수만 개의 도서관과 역사와 과학지식이 내 주머니 속에 들어왔다. 챗GPT는 기존의 생산방식과 인간관계에 완전히 새롭고 낯선 지평을 열었다. 마치 250년 전 증기기관이 세상을 바꾼 것처럼. 이것이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두렵고 경이로운 인공지능 출현
갑마장 한국 기마군단을 키워야
4만 양병엔 치밀한 설계가 절실
굿판 같은 정치로 몰락할까 걱정

문명사가들이 주목했던 4차 산업혁명의 ‘총아’가 AI, 그것도 대화형 생성 AI로 수렴되는 순간이었다. 2016년 알파고가 출현했을 때 그런 예감이 들기는 했지만 불과 7년 만에 전지적(全知的) 기계인간의 탄생은 무섭고 경이롭다. 전지에서 전능(全能)으로 치달을 인공지능이 드디어 첨단과학기술을 석권하고 왕좌에 등극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정보화로 통칭된 지난 40년간은 챗봇 AI 탄생을 향한 짧은 전환(transition) 과정이었다. 우리가 사활을 걸었던 반도체는 실리콘 밸리를 4차 산업혁명으로 진입시킨 징검다리였을 뿐이다. 천신만고 끝에 반도체 강국이 된 것은 대견한데, 한국은 이제 실리콘 제국의 글로벌기업들이 새롭게 펼친 AI 문명의 대초원 앞에 망연자실한 모양새가 됐다.

게다가 반도체를 대체할 신물질이 출현하면 전환의 교량은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다. 화석연료가 원자력으로, 원자력이 수소에너지로 대체되는 것처럼, 실리콘 반도체도 언젠가 미지의 소재로 대체될 날이 올 것이다. AI문명은 시작됐는데 반도체의 생명은 시한부인가? 그렇다면 한국은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AI문명에 대한 의욕적인 도전을 감행해야 한다. 가망이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렸던 1980년대 초반 선구적 기업인이 온 몸을 던졌듯이 말이다. 그 혜안과 결단이 없었더라면 지금 한국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을까?

몇 년 전 칼럼에서 필자는 한국을 군마(軍馬)를 공급하는 갑마장이라 단언했다. 실리콘 제국의 AI기업들은 한국의 갑마(甲馬)를 공급받아 세계를 휩쓰는 기마군단(騎馬軍團)을 키웠다. 인간 행위를 조각내는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그렇게 만든 빅데이터로 디지털 발자국을 좇고 개별 욕망을 조작하는 감시망을 촘촘히 펼친 것이다. 섬세하고 무서운 디지털 제국의 정보체계에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 19세기 기마군단이 폭주의 괴력을 휘둘렀다면, 21세기 디지털 기마군단은 마음을 분해하고 사고체계의 미립자들을 기호화한다. 인간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디지털 기마군단의 가공할 기획을 현실화한 것은 한국의 반도체산업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까지 갑마장 테우리에 머물 것인가.

얼마 전 정부가 제안한 ‘반도체 특별법’은 고작 법인세 인하로 봉합됐을 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미국처럼 ‘삼성웨이’나 ‘현대로’를 지정하거나 인프라를 무상 제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용인 클러스터는 땅 주인의 저항과 무연고 무덤 앞에 세월을 보냈다. 물과 전기 공급로를 찾아 마을과 도시를 우회했다. 저 지난한 작업을 기업 임직원 홀로 해냈다. 반도체 특별법은 오래전 완료돼야 했던 것, 정치가 지금 고심할 법은 미래지향적 ‘AI·디지털 특별법’이어야 한다. 그런데 꿈도 못 꾼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DJ정권이 제창한 저 국가적 슬로건은 적확했다. 그 덕에 여기까지 왔는데, YS와 DJ의 후예들은 잡사(雜事)에 국력을 탕진한다. AI 생태계는 척박하고 인력과 자본은 태부족인데 대안은 있는가?

지난 2월 17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필자는 ‘4만 양병설’을 제안했다. 전국에 전략적 ‘산학연 동맹’을 40개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서울 포함 수도권 20개와 지역 20개 동맹을 만들고 거점 대학별로 100명을 배출하면 10년에 4만 전문가를 배양한다는 기획이다. 본격화된 AI 전쟁에서 일 년 4000명 양성도 현재의 역량에 비춰 버겁겠으나 그래도 어찌하랴, 공은 일단 차 놓고 쫓아가는 게 맞다. 국가가 깃발을 올려야 함은 물론이다. 치밀한 국가설계도와 과감한 규제철폐가 필수 조건이다. 대학은 입학정원에 묶이고 등록금 동결에 신음한 지 벌써 십여 년을 훌쩍 넘겼다. 대학 캠퍼스에서 활력과 생기가 사라졌다. 그 사이, 미국 MIT는 몇 년 전 이미 1조 원을 투입해 AI대학을 최정예 기마병으로 키워냈고, 스탠퍼드대학은 모든 학부에 디지털 소프트웨어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리콘밸리 AI 군단은 한층 진화된 고집적회로와 팹리스를 한국에 거듭 요청할 예정이지만 언제까지 그럴까? 한국이 호흡을 가다듬을 틈은 아직 있다. 산학연 동맹군 결성이라는 절박한 과제를 구태의연한 규제 문법에 빠뜨린다면 한국은 개발도상국 지위로 떨어지는 서러운 불운에 처한다. 이스라엘 실리콘와디(계곡)엔 9500개 테크기업이 성업 중이란다. 그런데 말이다, 구석기시대 굿판 같은 정치를 어찌하랴. ‘그깟 5년 정권이 뭐라고.’ 0.73% 미세격차라도 국민 주권이었는데…, 챗GPT보다 섬뜩했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