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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10년 넘게 추적하는 간첩 수사, 국정원 손 떼면 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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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간첩 잡던 전 국정원 직원들 격정 토로〉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지난 15일 오후 5시쯤 국립대전현충원에 들어서 왼편으로 올라가니 소방공무원묘역이 나온다. 대구·남양주·창원 등지에서 순직했다는 글씨 가운데 특이한 내용이 눈에 띈다. ‘1996년 10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순직’.
소방교·소방장 같은 소방 공무원 직위가 새겨진 주변 묘비들과 달리 ‘이사관’이라고 씌어있다. 러시아에서 활동하다 집 앞에서 독침 등으로 살해당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 해외파트 요원 최덕근 영사의 묘소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전 국가안전기획부 요원 최덕근 영사의 묘비.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침 등에 살해된 그는 소방관들 사이에 잠들어 있다. 강주안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전 국가안전기획부 요원 최덕근 영사의 묘비.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침 등에 살해된 그는 소방관들 사이에 잠들어 있다. 강주안 기자

임무 중 순직 '이름 없는 별' 19개 추모석
국정원엔 ‘이름 없는 별’ 조형물이 있다. 임무 수행 중 숨진 요원을 기리는 추모석이다. 2021년에도 별이 추가돼 모두 19개다. 이 중 하나가 최 영사다. 유일하게 신원이 공개된 최 영사는 나머지 18명의 동료와 함께 영면하지 못한다. 경찰·군인 등은 같은 묘역에 안장하지만, 국정원의 별은 누구인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숨졌는지 모든 내용이 기밀이다.
국정원 대공 수사 간부 출신으로 최 영사 추모를 주도해온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은 “소방관 사이에 자리한 최 영사 묘비를 볼 때마다 북한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위험한지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 간첩 수사에 평생을 바친 전직 대공수사 요원들은 요즘 근심이 많다. 올해 말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이 폐지되기 때문이다. 2020년 더불어민주당의 국정원법 강행처리로 국정원은 내년부터 간첩 수사를 못 하게 된다. 관련 기능은 경찰로 이관한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등의 여파다. 윤봉한 국가안보통일연구원 원장은 “경찰은 지금도 간첩을 얼마든 수사할 권한이 있다”며 “대공수사권을 이관하는 게 아니라 그냥 국정원 수사권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조 필수 해외 수사는 국정원 특기"
국민 입장에선 국정원이든 경찰이든 간첩만 잡으면 된다. 그런데 전문가 사이에선 “간첩을 못 잡게 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대공 수사를 오래 한 검찰·경찰 출신도 같은 얘기를 한다.
국정원의 간첩 수사 과정은 ‘이름 없는 별’ 만큼이나 베일에 가려졌다. 간첩을 잡으면 공작망을 이용해 다른 간첩도 추적하기 때문에 극도의 보안이 몸에 뱄다. 이 분야에서 20년 이상 활동한 전직 요원들을 찾아내 증언을 들었다. 이들은 “수사 과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국정원 수사권 폐지가 곧 간첩 수사 포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전직 요원 A씨는 친북 국가에 들어가 북한 정보기관 간부를 대상으로 벌였던 아찔한 수사를 잊지 못한다. 북측 요원이 즐비한 상황에서 현지 폭력배(갱)의 보호를 받으며 북한 간부를 모처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위태로운 담판을 거쳐 정보를 확보했다. 이를 단서로 남한에서 암약한 간첩들을 검거했다.
북한 공작원과 남한 간첩의 해외 활동을 좇는 과정에서 해당국 수사 기관에 체포되기도 한다. 전직 요원 B씨는 “정보 당국 간 피 말리는 협상이 벌어지며 제3국의 도움을 받는 등 해외 정보 역량을 총동원하게 된다”고 밝혔다. 신언 전 파키스탄 대사는 “해외 파트 공조가 필수이기 때문에 국정원이 아니면 간첩 수사는 힘들다”고 설명한다.

단서 포착부터 판결까지 10년 소요
간첩 한 명을 잡으려 10년 이상 추적하는 일이 다반사다. 전직 수사관 C씨는 간첩 신문 도중 해외에서 암약하는 북한 공작원의 정체를 파악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분명 해당국의 국민으로 돼 있는 인물인데 북한 공작원이라며 이름까지 적시하더군요.” 즉각 해외 파트와 공조가 시작됐다. 다각도로 추적해 북한 사람이라는 단서를 잡아내는 데만 몇 년 걸렸다. 그가 남한 내 간첩으로부터 보고를 받는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과정에 수년이 소요됐다.
남한 간첩의 신원을 확인한 이후에도 수사는 계속된다. 결정적인 물증이 없으면, 재판에서 무죄가 나올 수 있다. 극비의 수사 기법을 통해 그가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는 장면을 잡았다. 첫 단서를 포착한 때부터 간첩죄 유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10년 넘게 걸렸다. 한번 발령을 받으면 대공수사국에 뼈를 묻는 국정원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수사다. 공안통인 전직 검찰 간부는 “간첩을 잡으려면 10년 이상 사명감으로 지속해야 하는데, 경찰은 승진하면 인사이동을 통해 편한 보직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며 “국정원 수사권 폐지는 간첩 수사를 안 하겠다는 거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평생 한 분야에 집중하며 축적한 전문성은 간첩 설득에 긴요하다. 남파 간첩 ‘은하수’를 신문했던 D씨는 “조사 도중 요덕수용소 주변 약도를 그리길래 ‘여기 방앗간이 있지 않으냐’고 지적하자 놀라며 태도가 변하더라”고 회상했다.

"20년은 근무해야 제대로 수사 가능"
간첩은 수사가 가장 힘든 상대로 꼽힌다. 황흥익 단국대 겸임교수는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믿기에 죄책감이 없고 사상무장이 철저한 간첩을 신문하려면 국정원의 전문적인 기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A씨는 “요즘 간첩은 수사 요원을 법적으로 역공하는 기법도 엄청나다”며 “20년 정도는 대공 업무를 해야 간첩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간첩의 주도면밀함은 수사관들을 아찔한 순간으로 몬다. 1997년 부부 간첩 사건 당시 체포된 강연정이 독약 앰풀(1회용 용기)로 자살했다. 28살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도 놀랍지만, 철저한 몸수색에도 발견되지 않도록 앰풀을 숨긴 기법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C씨는 안가의 한 방에서 숙식해온 간첩이 며칠 뒤 “함께 죽으려 했는데 너무 인간적으로 대해줘 마음이 바뀌었다”며 어디선가 면도날을 꺼내 머리가 쭈뼛했던 기억이 있다.
무수한 성공과 실패 경험이 국정원 요원을 단련시킨다. 한 전직 경찰 대공수사 간부의 견해다. “오래전엔 경찰이 대공수사를 가장 잘했다. 그런데 국정원이 대공수사를 강화하고 해외 공작이 중요해지면서 국정원이 주도하게 됐다. 경찰은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박종철 고문치사’가 벌어진 뒤 수사 역량이 위축됐다. 과거로 돌아가겠다면 조직과 인력을 대폭 늘리고 최소 5년은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그래도 해외 수사는 국정원이 맡아야 한다. 올해 말 국정원 수사권을 폐지하면 간첩은 이제 못 잡는다고 보면 된다.”

경찰 "대공 수사 기관은 원래 우리"

지난 10일 오후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이 간첩 수사가 진행됐던 남산 옛 안기부 제5별관을 설명하고 있다. 강주안 기자

지난 10일 오후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이 간첩 수사가 진행됐던 남산 옛 안기부 제5별관을 설명하고 있다. 강주안 기자

경찰에선 자신감을 표한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지난 6일 “1945년 이후로 경찰은 대공 수사의 본래적이고 1차적인 수사기관”이라며 “경찰의 대공수사 역량이 높아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작업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국정원 출신인 민주당 김병기 의원은 “개정 국정원법상 국정원은 수사권만 사라졌지 정보 수집이나 조사 권한은 보유한다”며 경찰과 정보 공유만 잘하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 10일 오후 장석광 사무총장과 함께 남산에 있는 옛 중앙정보부 자리를 돌아봤다. 정치인·언론인이 끌려왔다는 설명이 붙은 ‘제6별관’이 보인다. 터널을 지나자 나타난 중부공원여가센터 건물이 간첩 수사를 하던 ‘제5별관’이다. 장 총장이 일하던 2층엔 ‘민생사법경찰단’이 들어왔다. 간첩 조사실이 있던 지하는 구내식당이 됐다.

그는 안기부가 1995년 내곡동으로 이전한 뒤 처음으로 건물에 들어와 봤다고 했다. “박원순 시장 시절 주변을 단장했다기에 아내와 와봤는데 온통 부정적 얘기들만 여기저기 써놓아 상심이 컸다”고 한다. 그는 “대공수사 요원들은 간첩 잡기에만 전념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 파트에서 주로 근무한 국정원 간부는 “입사 초기 일이 힘들다고 선배에게 하소연하면 ‘우리보다 몇 배 힘든 대공수사 쪽을 생각하라’며 달래주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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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정찰총국 간부 “국정원 수사권 폐지 북한서 좋아할 것”

몇 년 전 탈북한 전 북한 정찰총국 간부는 지난 14일 기자와 통화에서 “북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국정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북한) 요원들에게 ‘국정원 놈들을 절대로 믿지 말고 100% 경계하라’고 교육한다”고 소개했다.
인터넷 시대에 북한이 간첩을 보낼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엔 “남한은 여러 번 정권이 교체됐지만, 북한은 80년 동안 한 번도 바뀐 적이 없고 대남 전략을 계속 강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정원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다면 북에선 아주 좋아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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