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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메기와 고래, 그리고 용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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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 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 디렉터

“글쎄, 은행이란 게 그리 간단한 비즈니스가 아니라서….”

2017년 인터넷전문은행들이 태동하던 무렵이었다. “위기감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 금융지주 회장은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파괴력이 생각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였다. 이유는 이랬다. “일단 은행이란 이름이 붙는 순간, 그간 겪어보지 못한 수준의 규제 장벽을 마주할 겁니다. 금융은 규제 산업이고 관치(官治)의 본류 아닙니까. 우리야 그런 환경에서 익숙하지만, IT업체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겠습니까.”

증권업에서 일가를 이룬 또 다른 최고경영자(CEO)에게 “인터넷은행에 도전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냉담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는 “겹겹의 규제와 간섭 속에서 정해진 이자나 받으며 안주하는 게 은행 아니냐”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은행 ‘돈잔치’에 대통령 “과점폐해”
‘메기’ 푼다고 ‘고래’ 은행 움직일까
‘카르텔’ 꼭대기 당국부터 변해야

김주현 금융위원장(왼쪽)과 이복현 금융감독 원장이 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 참석해 대화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김주현 금융위원장(왼쪽)과 이복현 금융감독 원장이 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 참석해 대화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6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예측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그간 금융당국은 카카오뱅크·K뱅크에 이어 토스뱅크까지 세 곳의 인터넷전문은행을 투입했다. 하지만 공고한 과점체제에 눈에 띄는 균열은 나타나지 않았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총자산은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전체 은행 자산의 70.7%로 별 변화가 없다. 반면 가장 규모가 큰 카카오뱅크가 1.3%, 토스뱅크와 케이뱅크는 각각 0.8%, 0.4%다.

이런 과점체제가 다시 주목받게 된 건 금리 인상 국면에서 은행들이 막대한 이자 수익을 내면서다. 나날이 늘어나는 대출 이자에 민심이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자 정치권과 금융당국은 잇달아 은행을 압박하고 나섰다. 별다른 경쟁 없이 손쉽게 이익을 내고, 그렇게 번 돈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인다는 비판이 봇물이 터지듯 했다. 한 발 더 나가 윤석열 대통령은 “은행 산업 과점의 폐해가 큰 만큼 실질적인 경쟁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금융당국도 바빠졌다. 당국이 검토하는 유력한 방안은 진입 장벽을 더 낮추는 것이다. 인터넷은행을 추가로 인가하거나 은행업 라이선스를 쪼개 특정 분야만 다루는 은행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6년 전과 유사한 처방이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플레이어를 다시 투입한다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까.

인터넷은행도 처음에는 정체된 시장에 경쟁과 혁신의 파문을 일으킬 ‘메기’로 불리며 한껏 기대를 모았다. 미꾸라지만 그득한 수조에 포식자인 메기를 투입하면, 미꾸라지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생존율도 높아진다는 원리다. 물론 효과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소비자의 선택권은 늘었고, 모바일뱅킹은 더 편리해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시장의 판 자체는 흔들리진 않았고, 혁신적 금융상품도 눈에 띄지 않는다.

대통령 지적대로 ‘실질적 경쟁’이 일어나지 못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시중은행은 미꾸라지보다 고래에 가까웠다. 잇따른 인수합병으로 덩치를 키우고 시장을 장악한 덕에 메기가 일으키는 파장 정도로는 꿈쩍하지 않았다. 한계를 느낀 메기도 수조를 휘젓는 대신 사료 부스러기에 만족하는 모양새다.

물속에는 고래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용왕’도 존재했다. 바로 금융당국이다. 은행 시스템의 안정성과 소비자 보호를 명분으로 시장에 전방위로 개입하는 금융 생태계의 지존격이다. 상품 개발과 판매는 물론 인사와 채용, 배당 등 수익 배분까지 은행의 일에 꼬치꼬치 간여한다. 아예 심판복을 벗고 고액 연봉의 금융사 CEO와 임원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용왕이란 표현대로 당국은 스스로 전지전능한 양, 최적의 균형 상태를 알고 있는 양 행동한다. 한 발 더 나가 ‘경쟁의 한계’까지 규정한다. 어떤 때는 예금자들을 위해 금리를 올리라고 했다가, 또 은행들이 금리를 올려 자금 확보 경쟁에 나서면 “과당경쟁을 자제하라”는 지침을 내린다.

한편으론 자신의 어장을 위협하는 외부 경쟁자의 영역 침범을 견제한다. 핀테크 업체들이 간편송금 등의 서비스를 확대해 나가자 ‘기울어진 운동장론’을 언급하며 “너희도 똑같이 규제를 받으라”고 일갈한 게 대표적이다.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하며 생태계 다양성은 훼손된다. 결국 남은 건 자산 구조도, 상품도, 금리도 ‘판박이’인 일란성 쌍둥이뿐이다. 이러니 경쟁이 될 리가 만무하다. 이런 환경에 또다시 메기 몇 마리 투입한다고 대통령이 언급한 ‘이권 카르텔’이 깨질 리 없다. 보여주기식이 아닌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카르텔의 정점에 있는 금융당국이 바뀌는 게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