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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싫은 일도 해내는 능력 기르는 10대…뭐든 다양하게 시도하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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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작업지시서가 뭐예요?” ‘한복 인플루언서’ 이지언(33)씨가 2018년 디자인을 시작할 때 했던 질문입니다. 패턴이 뭔지도 몰랐고 패턴을 의뢰하기 위한 작업지시서를 PPT로 만들 만큼 초짜였죠. 물론 기본적인 옷의 생산과정조차 몰랐어요.

2023년 2월의 지언씨는 패션 디자이너이자 브랜딩 고수로 인정받은 창업가입니다. 그는 “전공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패션 일을 못 하는 건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패션은 *리얼웨이(Realway)를 다루는 일이다 보니 기술적으로 옷을 잘 아는 것보다 오히려 통합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 잘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죠.

이지언 대표가 모델로 촬영한 ‘2020 한복셋업’. 80년대 빈티지 한복원단을 재해석한 1:1 커스터마이즈 셋업이다.

이지언 대표가 모델로 촬영한 ‘2020 한복셋업’. 80년대 빈티지 한복원단을 재해석한 1:1 커스터마이즈 셋업이다.

“전공 못 했다고 패션 일 못 하는 건 절대 아니야” 

20대 초반 지언씨는 우연히 한복을 입어보고, 그 실루엣이 자신의 하체비만 체형 콤플렉스를 가려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심지어 예쁘기도 했죠. 한복을 입은 사진을 SNS에 올리면서 패션 인플루언서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2010년 한국외대 터키 아제르바이잔어과에 입학했지만 공부할수록 언어 분야는 자신의 진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케팅이나 광고에 관심이 있었기에 경영학을 이중전공 했죠. 4학년이던 2015년, 취업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좋아하는 한복 브랜드 5개를 모아 홍대에서 팝업스토어를 열었어요. “하루 1000만원이라는 놀라운 매출이 발생했어요. 막연하게 ‘이게 사업이 되는구나’ 정도의 감을 잡았죠. 하지만 비즈니스는 잘 몰랐기에 시장이나 수익구조를 제대로 분석해보진 못했습니다.”

이후 ‘하플리(Happly)’라는 브랜드로 편집숍 형태의 단기 팝업스토어를 본격적으로 운영했죠.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어가 금세 1만 명을 넘어섰어요. 좀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2017년 프라이머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에 지원했습니다. 패션 편집숍이라는 비즈니스모델로서는 드물게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 기업가치 10억원으로 1억원의 투자를 받았어요. 당시 심사역들은 “하플리의 비즈니스모델은 상업성이 부족하지만 대표의 배짱이 좋아서 선정했다”고 입을 모았죠. 그들의 조언은 명확했어요. 편집숍이나 쇼핑몰, 플랫폼 사업이 아닌 지언씨가 자신의 감각과 아이디어로 직접 디자인하고 생산하는 독창적인 자체 패션 브랜드를 만들라는 거였죠.

한복 사진으로 패션 인플루언서가 된 이지언 대표는 패션 브랜드 ‘하플리’‘조선호랑이’를 만들고 디자이너와 모델 일까지 병행하고 있다.

한복 사진으로 패션 인플루언서가 된 이지언 대표는 패션 브랜드 ‘하플리’‘조선호랑이’를 만들고 디자이너와 모델 일까지 병행하고 있다.

디자이너 경력 시작, 브랜드 방향 전환 

패션 인플루언서 지언씨는 2018년부터 직접 옷을 디자인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봐도 초짜로,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며 하나씩 배워나갔죠. 편집숍 비중을 조금씩 줄이면서 직접 디자인한 제품을 분기별 2~3개씩 내놨는데, 생각보다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2018년 9월 롯데월드타워 지하 쇼핑몰에서 하플리 팝업스토어가 매출 1위를 달성하는 등 이후로도 쭉 성과를 올렸죠. 지언씨는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의 시각으로 접근한 특유의 독창성이 소비자들에게 매우 스타일리시하게 느껴진 것”이라고 비결을 설명했습니다. “2018~2019년은 그야말로 시행착오의 시기였어요. 단순히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그 일을 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죠. 그때의 저는 일을 좋아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일을 잘하기 위해 갖춰야 할 역량은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창업가로서의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했지 않았나 후회도 됩니다.”

이즈음 하플리만의 유니크(Unique)한 점을 좋아하던 남성팬이자 코파운더(공동창업자)가 된 이시영씨를 만났죠. 그는 남성들도 입을 수 있는 한국적인 패션 브랜드를 함께 만들어볼 것을 제안했어요. 시영씨 역시 패션 전공자는 아니었죠. 운동선수·육군 장교 등 조직생활 경험이 있는 그에게서 지언씨는 자신에겐 부족한 지혜와 트렌드를 내다보는 안목을 발견했어요. “시영씨는 조만간 남성들을 위한, 또는 *젠더리스(Genderless) 패션 트렌드가 다가올 것이라고 전망했어요. 당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와디즈에는 남성 이용자가 많았는데 남성 브랜드를 하게 된다면 와디즈에서 해보자고 했죠. 우연히 와디즈 PD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고 2018년 11월 젠더리스 브랜드 준비를 시작해 2019년 3월 ‘조선호랑이’ 재킷을 출시했어요.”

‘조선호랑이’ 자켓 흑호. 2022년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으로 8000만원을 모금했으며, K-RIBBON(우수문화상품)에도 지정됐다.

‘조선호랑이’ 자켓 흑호. 2022년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으로 8000만원을 모금했으며, K-RIBBON(우수문화상품)에도 지정됐다.

하플리의 세컨드라인 ‘조선호랑이’는 와디즈에서 펀딩 기간 9300만원의 매출을 올렸죠. 한복을 접목한 전통 패션 브랜드로는 이례적인 성과였어요. 조선호랑이는 와디즈에서 4회, 텀블벅에서 2회 크라우드 펀딩을 실시해 2023년 2월까지 와디즈 누적 4억원, 텀블벅 3억원을 달성했죠. 크라우드 펀딩은 지언씨의 이야기를 비롯해 제품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해 많은 팬을 확보하는 통로가 됐습니다. 2020년부터 디자인에 한복과 일반 패션의 경계를 두지 않는 지언씨는 “하플리와 조선호랑이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며 “더 이상 한복 브랜드가 아닌 패션 브랜드”라고 말했죠.

어렵고 속상해도 멈추지 않으면 실패 아니다 

2017년 1인기업으로 시작한 하플리는 2020년엔 한국적인 작업을 하는 브랜드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패션대상’에서 은상 및 장관상을 받았어요. 2021년에는 포브스코리아 선정 ‘2030 패션파워리더’에 선정됐고, TV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 ‘스트릿우먼파이터’에 제품을 메인으로 노출하기도 했죠. 2022년에는 정부 신인디자이너 지원사업에 선정됐고, 피겨스타 김연아씨와 ‘2022 한복웨이브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습니다. 매번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던 지언씨에게 실패의 경험에 관해 물어봤죠.

‘놀면 뭐하니?’ 프로그램에서 유야호(유재석)가 조선호랑이의 ‘선암사호랑이’ 셔츠를 입은 모습.

‘놀면 뭐하니?’ 프로그램에서 유야호(유재석)가 조선호랑이의 ‘선암사호랑이’ 셔츠를 입은 모습.

“저는 지금도 실패를 숨 쉬듯이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2022년 9월 이후 회사 규모를 줄였고, 올해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다음(Next)’을 모색하는 일종의 브랜드 갭이어를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쉬어가는 것도 실패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계속 뭔가를 하고 있으면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과정 속에서 어려움이나 속상했던 적은 있었지만 계속 뭔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실패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술가처럼 혼자 신나서 열심히 해왔지만 회사는 생각만큼 성장하지 않았죠. 뚜렷한 방향성이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자 새로운 방향성을 찾는 일, 즉 *리브랜딩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어떻게 하면 50년, 100년 지속 가능한 브랜드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죠.

2022년 한류연계 협업콘텐츠 기획개발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 김연아가 하플리 디자인을 입은 모습.

2022년 한류연계 협업콘텐츠 기획개발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 김연아가 하플리 디자인을 입은 모습.

“이지언이라는 사람은 계속 변화하고 있어요. 5년 전 패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디자인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다양한 패션 전문가들과 협업하며 결과물을 만들어내죠. 적어도 패션기업의 대리~과장급 이상의 업무는 해내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대리 역량으로 회사를 이끌 수는 없죠. 저도 나이가 들 텐데 언제까지 열심히만 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채용이나 인사관리도 해야 하고, 조직문화도 만들고, 매뉴얼 또는 시스템도 만들고, 경영의 큰 그림도 그려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런 고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언씨는 좋아하는 일을 하기 전에 자신이 왜 이 일을 하고 싶은지 개똥철학이라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10대, 20대 때는 시기마다 반드시 해야 할 경험들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죠. “10대 때는 싫은 일도 해내는 능력을 기르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저는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무엇을 하든 엉덩이의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적이 안 나오더라도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해볼 것을 권해요. 저는 연예인을 좋아해서 엄청 쫓아다녔어요. 홍대도 가보고 성수도 가보고 박물관‧전시회‧콘서트도 가보면서 하나에 몰입하기보다는 뭔가를 다양하게 시도해봤으면 좋겠어요. 10대는 자신의 취향을 알아보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요. 자신의 취향을 알게 되면 20대 초반엔 해보고 싶은 걸 몸으로 직접 경험해보는 거죠.”

하플리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이 주관한 2022 전통문화 메타버스 체험 콘텐츠 개발 사업에 참여해 제페토에서 다양한 의상을 선보였다.

하플리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이 주관한 2022 전통문화 메타버스 체험 콘텐츠 개발 사업에 참여해 제페토에서 다양한 의상을 선보였다.

패션 관련 직업을 갖기 위해 꼭 전공해야 하는지 묻자 지언씨는 “패션 전공을 하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관련 학과에 가면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관련 문화를 느끼는 것은 도움이 많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전공을 못 했다고 패션 일을 못 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라고 거듭 강조했죠. 이어 패션을 잘하는 방법으로 트렌드에 민감하고, 많이 보고(디자이너들의 자료), 많이 입어볼 것을 추천했어요. 옷을 많이 사 입어보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고, 굳이 옷을 사지 않더라도 다양한 옷을 접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많이 보고 트렌드에 민감해지면 일은 그냥 하면 돼요. 현장에서 노력하면 다 잘할 수 있습니다.”

성공에 대한 지언씨의 생각도 물어봤습니다.

“돈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것도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제 생각은 돈 많이 벌고 유명해지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때, 성공한 삶이라 생각해요. 저는 정말 일을 안 했으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 부딪혀 가면서 자신을 알게 되고 인간적으로도 성숙해졌으니까요. 그동안 일만 했다면 이젠 인생을 좀 더 풍성하게 살기 위한 경험을 해볼 생각이에요. 다양한 경험을 하면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2022 시즌 그리팅에서 하플리의 ‘단청페이즐리 크롭블루종’을 입은 청하.

2022 시즌 그리팅에서 하플리의 ‘단청페이즐리 크롭블루종’을 입은 청하.

룩북 촬영이나 외부 자료에는 모델을 기용하지만 때론 지언씨가 직접 모델이 됩니다. 모델 쪽 핏이 더 잘 나오지만 지언씨가 모델을 한 사진을 SNS에 올릴 때 고객들의 반응이 더 뜨겁기 때문이죠. 1년 넘게 모델을 하지 않았는데, 최근 고객조사에서도 지언씨가 다시 모델을 해달라는 요청이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저는 스스로 모델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회사가 커지면 저의 모델 비중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고객의 생각은 달랐어요. 제가 직접 옷을 입고 보여줄 때 사람들이 매력과 일체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옷 안에 저의 DNA가 있다, 저라는 사람의 많은 것들이 브랜드에 녹아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아는 것 같아요. 그런 반응을 보고 모델 일 역시 저의 잡(job)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느 하나 허투루 해선 안 되겠더라고요. 앞으론 제가 하는 모든 일과 경험에 더 몰입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 인생에도 몰입할 수 있겠죠?”

*리얼웨이(Realway): 실제로 우리가 입고 생활하는 옷을 의미. 이와 반대로 패션쇼에 보여주기 위한 옷을 런웨이라고 한다.

*젠더리스(Genderless) 트렌드: 너무 남성적이거나 여성스러운 스타일보다 중성적인 패션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는 현상. 젠더리스를 비롯해 ‘젠더 뉴트럴(Gender-neutral)’, ‘젠더 플루이드(Gender-fluid)’, ‘젠더 인클루시브(Gender-inclusive)’, ‘젠더 프리(Gender-free)’ 등으로 표현되는, 특별히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패션을 원하는 소비자가 증가하면서 최근 많은 패션 브랜드는 이에 맞춰 발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

*리브랜딩(rebranding): 소비자의 기호나 취향, 환경의 변화 등을 고려해 기존 제품·상표의 이미지를 새롭게 창출하고, 이를 소비자에게 인식시키는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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