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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훈 칼럼

타이밍 찾아온 한·일 관계 정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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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주필

최훈 주필

침팬지에게서 인간의 DNA를 역추적하는 학자들이 찾은 흥미로운 본성이 있다. ‘동맹’이다. 대장 수컷이 되려는 침팬지는 슬슬 우군을 만든다. 킹메이커의 환심도 사두고, 나뭇잎 먹이도 나눈다. 그리고 등극의 때를 기다린다. 절호의 순간, 쿠데타다. 영원한 권력? 그런 건 없다. 또 다른 젊은 침팬지가 다시 새 동맹을 노린다. 30여 마리 무리 중 1년에 1000회 이상의 크고 작은 연합들이 목격된다(프란스 드 발 『침팬지 폴리틱스』). 주적에게 맞서 힘을 모으는 게 인류의 생존 본능이다. 자신이 홀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줄 나라, 완벽한 동맹 상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험해진 미·중 냉전, 틈새를 파고든 북한의 도발, 극도로 불안정한 동아시아. 우리 자력으로 헤쳐나가기엔 모두가 버겁다. 북핵은 오바마부터 바이든까지의 확장 억제 속 ‘전략적 인내’밖엔 길이 없어 보인다. ‘거악의 괴물’ 소련이 스스로 무너지는데 든 인내의 시간은 68년11개월26일이었다. 지금 우리가 자력으로 성취할 외교는 단 하나. 일본과의 관계 복원이다. 우리의 월드컵 16강 진출보다 그들의 8강 좌절에 더 안도할 정도로 밉상인 그 나라와 왜 풀고 가야 하는지, 왜 지금인지의 공감대가 우선이겠다.

푸틴의 핵 위협, 중국의 팽창에
일본 내 안보 불안 심리도 급증
정권 득실, 원한·이념보다 ‘필요’
선택지 넓힌 대승적 대화 기대

당장 일본이 좀 급하다. “2차대전 이후 가장 급변한 대외정책 전환기”(기시다 총리)라고 한다. 쿠릴열도 4개 섬의 반환을 꿈꾸며 푸틴과 온천에 몸 담갔던 아베. 혐한은 극대화하며  27차례나 푸틴과 만났던 두 마초들의 밀월 시대는 가물해졌다. 푸틴의 핵 위협 이후 러시아와의 북방 영토 분쟁은 오히려 위협이 돼버렸다. 핵무기 피해를 유일하게 겪은 이 나라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트라우마도 겹쳐 있다. 그뿐인가. 그제 일본 홋카이도 서쪽의 배타적 경제구역에 떨어진 북한의 장거리탄도미사일(추정)은 가장 근접한 위기의 실체였다. 기시다는 부친의 고향이자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히로시마에서 5월 19일 G7 정상회담을 주최한다. ‘서방 민주주의 강국과의 연대’‘안전과 평화의 상징’으로 삼으려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의 초대를 받을 것인지도 외교적 관심사다.

더 큰 두려움은 중국. 일본인 77%는 “푸틴의 도발이 중국의 대만 무력 행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응답(닛케이신문)했다. 일본 서남단 섬에서 160㎞ 거리가 대만. 목포항에서 신안 가거도보다 조금 멀다. 체감 안보가 우리와는 다른 일본이다. 이미 중국과의 분쟁 지역인 난세이(南西)제도에 병력과 미사일 부대를 증강하고 있다. ‘일본은 방패만, 창은 미국에’로 77년의 공짜 평화를 즐기며 돈만 벌던 그들은 자칭 “새시대의 현실주의 외교”(기시다)로 급변하고 있다. 미사일 반격을 용인하는 사실상의 전쟁 가능 국가로 탈바꿈했다. 국민 65%가 찬성. 금기였던 국방비도 2027년까지 현재의 2배 가까운 증액이다. 일본의 최우선은 지금 안보다. 그 앞 중·러 대륙의 최전방에 한국이 있다. 일본에 가장 완벽한 동맹의 대상은 어디일까.

한국에 삐딱하던 주요 언론들도 달라져 간다. “북핵, 미사일과 중국의 대만 군사 위협이 강화된 지금 일본·미국·한국 간의 협력 강화는 필수적이다. 그 전제가 한·일 관계 개선”(요미우리 1월 20일),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윤석열 정부의 노력을 지지할 것”(닛케이 1월 28일), “일·한 양 지도자의 강제노동 문제 조기해결 모색을 환영한다. 회담을 정례화하고 북한 등의 해결에 함께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아사히 지난해 11월 15일)

두 나라의 화해를 가장 원하는 나라, 미국이다. 중국의 동아시아 팽창 봉쇄의 최종 병기는 한·미·일 동맹이다. “한·일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블링컨 국무장관은 오바마 정부의 부장관 시절 으르렁대던 한·일 관계를 열정적으로 중재했었다. 3국 외교차관들의 20여 차례 회담 끝에 위안부 합의를 유도했다. 바이든 역시 부통령 시절인 2013년 아베 총리와의 회동 후 “한·일 협력과 관계개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선언했었다. 그해 아베의 야스쿠니 참배 2주 전 “절제하라”고 권고한 이도 그였다. 그는 “박근혜·아베  모두 개인적 친분 속에 나를 믿었기 때문에 깨진 부부관계를 복원시킬 이혼상담사를 했다”(2016년 ‘애틀랜틱’ 인터뷰)고도 했다. 북핵에 가장 확고한 억제 수단인 한·미 동맹을 위해서도 고리인 일본과는 풀고 가는 게 지혜다. 정밀 부품·소재와 첨단산업 공급망의 한·일 공조도 안보만큼 가치가 높아져 있다.

핵심은 강제징용 배상의 해법일 터다. 한국의 지원재단이 먼저 제3자 변제를 하고, 관련 일본 기업들도 배상 기금에 출연토록 하자는 게 정부안의 골격. 무엇보다 피해자 측 설득과 동의에 정부가 최선의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사죄성 기금 출연엔 부정적인 일본 자민당에 대한 정무적 대화 채널도 가동돼야 한다. 우리가 먼저 조급해 할 필요는 없겠다. 지금은 한·일 양국이 서로 뭘 도울 수있을지 길고 크게 봐야 할 시간이다. 사방이 미증유의 위협이다. 원한·이념, 국내 정치적 득실보다 미래를 향한 ‘필요’가 동맹의 최우선 기준이다. 양국 모두 그 나머지엔 선택지를 좀 넓혀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