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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권의 미래를 묻다

거꾸로 흐르는 시간, 정말 공상에 불과한 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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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시간여행의 세계

박권 고등과학원 교수

박권 고등과학원 교수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과거로 갈 수도 있고 미래로 갈 수도 있을 텐데, 유독 과거로 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미래는 궁금할 뿐이지만 과거는 후회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과거로 돌아가 후회하는 일을 새롭게 다시 하는 상상을 해 보았을 것이다.

시간여행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시간 역설이라고 불리는 모순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과거로 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나중에 그 사람이 태어나지 않게 되므로 과거로 갈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가 죽지 않으니 그 사람이 다시 태어나게 되고, 또 그렇다면 그 사람이 과거로 가 다시 할아버지를 죽이는 모순적 상황이 무한히 반복된다. 역설이다. 물론 시간여행이 불가능하면 시간 역설은 없다. 하지만 혹시 시간여행이 가능하면서 시간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을까.

과거로 시간여행 영화가 많은 이유
후회된 일 돌이키고 싶은 마음 때문
양자역학 세계에선 시간 역행 가능
‘시간 역행’ 양전자 이용 PET 촬영


시간 역설을 해결하기 위하여

미래를 묻다

미래를 묻다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라면 모름지기 시간 역설을 해결해야 한다. 논의의 편의상 영화에서 다뤄진 시간여행을 ①운명 개조 ②다중 우주 ③시간 고리 ④자기 일관 ⑤시간 역행, 이렇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보자.

우선, 시간여행의 첫 번째 유형인 ‘운명 개조’는 말 그대로 과거로 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주인공 마티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괴짜 과학자 브라운 박사가 타임머신으로 개조한 자동차 ‘드로리안’에 우연히 타서 1985년에서 1955년으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그렇게 과거로 간 마티는 우여곡절 끝에 부모님을 다시 사랑에 빠뜨리는 데 성공하고, 1985년으로 되돌아온 후 활기로 가득 찬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게 된다. 기분 좋은 해피 엔딩이지만 여기 논리적 모순이 있다. 마티의 예전 가족은 어디로 간 것일까. 혹은 마티의 예전 가족은 갑자기 기억을 잃고 활기로 가득 차게 된 것일까.

이 논리적 모순은 시간여행의 두 번째 유형인 ‘다중 우주’에서 해결할 수 있다. 다중 우주는 사실 영화 ‘백 투 더 퓨처 2’의 핵심 아이디어다. 자신의 자식에게 발생할 어떤 불행한 사건을 막기 위해 2015년으로 간 마티는 미래에 온 김에 스포츠 연감을 이용해 큰돈을 벌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을 엿듣고 있던 악당 비프는 몰래 드로리안을 타고 1955년으로 돌아가 젊은 자기 자신에게 스포츠 연감을 넘긴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1985년으로 되돌아온 마티와 브라운 박사는 원래 1985년하고는 너무나 다른 암울한 1985년을 맞닥뜨리게 된다. 어떻게 된 것일까. 스포츠 연감을 입수한 젊은 비프는 큰돈을 벌어 온갖 나쁜 짓을 하고 그 결과 새로운 1985년은 범죄로 얼룩진 암울한 세상이 된 것이다. 브라운 박사는 이 암울한 세상이 원래 우주에서 파생되어 나온 대안 우주라고 설명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과거를 갈 때마다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는 것이다.

다중 우주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시간여행의 세 번째 유형인 ‘시간 고리’가 된다. 이 유형은 어차피 과거로 갈 때마다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므로 아예 주어진 시간 구간을 무한히 반복한다. 시간 고리를 대표하는 영화는 1993년 미국에서 제작된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다(한국 개봉 제목은 ‘사랑의 블랙홀’).

주인공 필 코너스는 미국 피츠버그 지역 방송국의 기상 전문기자다. 필은 매년 펑서토니라는 도시에서 열리는 그라운드호그 데이 축제를 취재한다. 그라운드호그는 땅속에 사는 다람쥣과의 동물인데, 겨울잠에서 깬 후 굴에서 나오다가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 다시 겨울잠을 자러 들어간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에 따라 겨울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점치는 전통이 생겼는데, 이것이 바로 그라운드호그 데이다. 그러던 필에게 어느 날 그라운드호그 데이가 계속 반복되기 시작한다. 필은 아무리 어떤 일을 해도, 심지어 죽어도 하루가 지나면 언제나 그라운드호그 데이 아침에 눈을 뜨게 된다. 영화는 이러한 상황에 처한 필이 어떻게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지를 잔잔하게 보여준다. 시간 고리는 과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다중 우주는 무수히 많은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과학적으로 부담이 된다. 혹시 단 하나의 우주에서 시간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을까.

시간여행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유형인 ‘자기 일관’과 ‘시간 역행’은 단 하나의 우주에서 시간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났다

자기 일관을 대표하는 영화로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가 있다. 해리 포터와 시리우스 블랙은 ‘디멘터’라는 무서운 악령에게 영혼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다행히 어떤 인물이 나타나 강력한 마법을 써서 디멘터를 쫓아낸다. 해리는 그 인물이 자신의 죽은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해리는 목숨을 구했지만, 시리우스는 결국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이때 해리의 스승 덤블도어는 ‘타임 터너’라는 시간여행 장치를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 시리우스를 구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과거로 돌아가 디멘터에 둘러싸인 자신과 시리우스를 목격하는 순간, 해리는 그때 그들을 구한 인물이 바로 해리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은 해리가 과거로 시간여행을 간다는 사실과 딱 맞게 자기 일관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시간여행의 마지막 유형인 시간 역행은 과거로 가는 과정마저 자기 일관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간 역행을 대표하는 영화는 바로 ‘테넷’이다. 영화 테넷에서 주인공은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뒤집음으로써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악당 사토르에 대항하기 위해 ‘시간 협공 작전’을 펼친다. 시간 협공 작전이란 시간에 순행하는 팀과 역행하는 팀이 서로 협동해서 적을 공격하는 전략이다. 시간 협공 작전의 놀라운 점은 다음과 같다. 시간에 역행하는 팀은 미래에서 왔기 때문에 이미 시간 협공 작전의 결과를 알고 있으며, 그 결과를 시간에 순행하는 팀에게 알려 줄 수 있다. 그리고 시간에 순행하는 팀은 시간 협공 작전이 끝난 후 방금 벌어진 시간 협공 작전의 결과를 다시 시간에 역행하는 팀에 알려 줄 수 있다. 순환 논리처럼 느껴지지만 시간 역행은 완벽하게 자기 일관적이다. 시간에 순행하든 역행하든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영화 테넷에는 특히 놀라운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시간에 역행하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장면이다. 대부분의 시간여행 영화에서 시간 여행자는 미래에서 과거로 순간적으로 이동한다. 기술적인 문제를 차지하더라도 물리학적으로 이것은 불가능하다. 에너지가 보존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테넷에서 시간에 역행하는 사람은 시간에 순행하는 사람이 모종의 회전문을 통과하면 만들어진다. 이 장면을 외부 관찰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회전문에서 시간에 순행하는 사람과 역행하는 사람은 서로 만나서 사라진다. 이 장면은 물리학적으로 놀라울 만큼 정확하다.

양자역학 세계와 시간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시간은 실제로 거꾸로 흐를 수 있다. 반(反)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물질은 시간에 역행하는 물질이다. 물질과 반물질은 서로 만나면 사라진다.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쌍소멸이라고 부른다. 쌍소멸이 일어나면 에너지 보존을 위해서 빛이 나온다.

예를 들어, 양전자라는 반물질이 있다. 양자전기역학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양전자는 시간에 역행하는 전자다. 우리의 일상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양전자는 사실 우리에게 매우 유용하다. 요새 암 진단에 자주 쓰이는 이른바 ‘양전자 방출 단층촬영’, 영어로 짧게 줄여서 PET라는 방법이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PET는 양전자를 방출하는 방사성 원소를 몸에 넣은 후, 그 원소가 방출하는 양전자와 주변의 전자가 쌍소멸 하면서 나오는 빛을 측정한다. 참고로, 방사성 원소는 포도당과 같이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부분에 흡수되는데, 보통 이런 부분이 바로 암이 자라는 곳이다. 결론적으로 시간은 실제로 거꾸로 흐를 수 있다. 다만, 그러기에 우리가 너무 클 뿐이다.

◆박권=이론 물리학자. 서울대 물리학과 학부를 졸업한 뒤 뉴욕주립대 스토니부룩에서 물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일대와 메릴랜드대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고등과학원의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2007년 고등과학원 학술상, 2017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을 수상했다. 저서로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가 있다.

박권 고등과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