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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아주까리 기름’에 묻힌 장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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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성지원 기자 중앙일보 기자
성지원 정치부 기자

성지원 정치부 기자

‘아주까리기름’만 부각된 지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8일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 8번째 순서였던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의 마이크가 꺼진 후였다. 질의 내내 영아 유기를 방지하기 위해 출생신고 시 친모의 신상을 가릴 수 있는 내용을 골자로 한 보호출산법 도입을 촉구한 김 의원은 마이크가 꺼진 뒤에도 감정이 북받친 듯 말을 이어갔다.

김 의원은 “생명을 지키는 문제에 여야와 이념, 정치가 있을 수 없다. 귀 좀 열어주시고, 덮어두고 반대하지 마시고 맞짱토론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회가 왜 있습니까. 목소리 큰 사람만 대변하는 곳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는 그 아기들을 위해서 국회가 있는 것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은 8일 대정부질문에서 보호출산법 도입을 촉구하며 야당의 호응을 받았다. [뉴스 1]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은 8일 대정부질문에서 보호출산법 도입을 촉구하며 야당의 호응을 받았다. [뉴스 1]

인상적인 장면은 그다음이었다. 이날 대정부질문 시작 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여당 의원들이 항의하며 대부분 본회의장을 나간 데다, 저녁 시간이라 야당에서도 10명이 채 안 되는 의원들만 의석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회의장 뒤편 더불어민주당 의원석에서 “함께하겠습니다”라는 외침이 들렸다. 김 의원이 발언을 마치자 다시 의원석에서 “잘하셨습니다” “잘했습니다”라는 호응이 나오며 박수가 쏟아졌다. 통상 본회의장 뒤쪽 좌석에는 다선이나 지도부 의원들이 앉는다.

보호출산제에 대한 찬반을 넘어서, 여당 의원의 호소에 야당이 “함께하겠다”고 호응하는 장면이 반갑고도 낯설었다. 이날 본회의장 밖에선 이 장관 탄핵안 가결에 대해 여야와 대통령실이 날 선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통령실은 “의회주의 포기”라며 국회를 비난했고, 여야는 “민주당의 반헌법적 폭거, 정치 쇼”(국민의힘), “윤석열 정부는 헌정사에 가장 부끄러운 실패한 정부”(민주당)라고 충돌했다. 대정부질문에서도 야당은 법무부 장관에게 “왜 이리 깐족대나”라고 비아냥댔고, 법무부 장관 수사지휘권 폐지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여당은 장관에게 “야당 대표를 구속수사하라”고 언성을 높였다.

얼마 전 보도된 한 신년 여론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4명은 정치성향이 다른 사람과 ‘밥도 먹기 싫다’고 답했다고 한다. 15일 열린 정치·학계 원로의 정치개혁 토론회에서 김부겸 전 국무총리는 최근 정치 갈등을 “정서적 내전 상태”라고 표현했다. 정치부 기자인 나도 일조한 면이 있어 부끄럽다. 국민의힘을 출입할 때는 야당 대표를, 민주당을 출입하면서는 대통령을 ‘절대악’으로 몰아붙이는 양당 지도부의 원색적인 발언을 기사에 충실히 실었다.

그래서 8일 마이크가 꺼진 본회의장 장면을 칼럼에 남기고 싶어졌다. 사실 국회에서도 가끔 진심은 통한다. 그런 진심이 오가는 모습이 계속 늘어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