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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세대 간 양보 필요한 지하철 무임승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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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은 줬다가 뺏어가는 사람이란 말이 있다. 애초에 뭔가를 줄 때부터 함부로 결정해선 안 되는 이유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 복지제도라면 더욱 신중히 해야 한다. 일단 시행한 복지제도는 나중에 축소하거나 폐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는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차흥봉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옛 소련에서 배워온 제도라는 점이다. 그는 1979년 보건사회부 과장 때 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당시 시내를 구경하다가 어떤 할머니가 무료로 버스를 타는 걸 봤다고 한다. 주위에 있던 학생에게 물어보니 노인에겐 무임승차 혜택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 공산국가는 사람 살 곳이 아니라고 배웠던 한국 공무원으로선 놀라운 장면이었다.

43년 전 경로우대 명목으로 시작
런던은 출근 시간대 유료로 운영
사회적 공론화로 합의점 찾아야

옛 소련 출장에서 돌아온 그는 당시 진의종 보사부 장관에게 경로우대제 도입을 건의했다고 한다. 아직 국내에는 노인복지법이 없던 때였다. 보사부가 제안한 ‘경로우대제 실시안’은 1980년 4월 11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70세 이상에게 철도·지하철·시외버스 요금과 공원 입장료 등을 50% 할인하는 내용이었다. 시행 시기는 그해 5월 8일 어버이날부터였다.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가 국정 전반을 담당하던 시절이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예전 국무회의 자료를 검색해 봤다. 이 자료에선 경로우대제 도입의 취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도시산업화 사회의 노인 문제에 대처하여 노인 복지 증진. 전통적 미덕을 기려 노인을 우대하고 경로효친 사상 양양.” 그러면서 “관계 부처(지하철은 서울시)와 합의했음”이라고 적었다. 정부는 이듬해 노인복지법을 시행하면서 할인 대상을 65세 이상으로 넓혔다. 84년에는 노인복지법 시행령을 고쳐 지하철 요금 할인 폭을 100%로 높였다.

지하철 노인 할인을 도입한 지 43년이 지났다. 그동안 세상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노인 인구가 급격하게 늘었다. 통계청은 65세 이상 인구가 내년에는 1000만 명을 웃돌 것으로 전망한다. 80년(146만 명)과 비교하면 850만 명 넘게 증가한 규모다.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도 계속 높아지고 있다. 내후년이면 한국은 유엔이 분류한 초고령사회(고령 인구 비율 20% 이상)로 진입한다.

예전엔 얼마 되지 않았던 노인 무임승차 인원도 이제는 사회적으로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기준으로 노인 무임승차는 연간 4억 회를 넘었다. 노인 1인당 평균으로 계산하면 약 53회다. 만일 돈을 내고 지하철을 탔다면 5500억원어치에 해당한다. 무임이 아니었다면 지하철을 타지 않았을 사람까지도 포함한 금액이다.

이제라도 노인 무임승차는 폐지하거나 할인 폭을 축소하는 게 답일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노인 무임승차로 인한 사회적 편익이 비용보다 많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14년 한국교통연구원이 펴낸 연구보고서(‘교통부문 복지정책 효과분석’)다. 보고서는 ▶노인 건강 증진과 우울증 감소 ▶노인 운전 축소로 인한 교통사고 감소 ▶노인 경제활동 확대로 인한 복지비용 축소 ▶관광 활성화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면서 “지하철 운영 적자의 근본 원인은 낮은 운임이지 무임승차 제도로 인한 손실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냈다.

대안은 없을까. 영국 런던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런던은 60세 이상에게 버스·지하철 등 대중교통 무료 혜택을 주고 있다. 65세 이상, 지하철만 무료 혜택을 주는 서울보다 범위가 넓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평일 오전 9시 이전에는 노인도 돈을 내야 한다. 복잡한 출근 시간대는 무임승차를 제한한다는 의미다.

우리도 혼잡 시간대에는 노인 무임승차를 제한하는 방안을 논의해 볼 수 있겠다. 혼잡 시간대가 아니면 탑승객이 다소 증가해도 지하철 운영사 입장에서 별로 비용이 늘어나지 않는다. 일부에선 이번 기회에 노인 기준 연령을 높이자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무임승차뿐 아니라 정년연장이나 연금 수급연령 상향 등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현재 노인 무임승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현행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기도 부담스럽고 아예 폐지하기도 어렵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묘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가 한 발씩 양보해 사회적 합의점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글 = 주정완 논설위원 그림 = 안은주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