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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허름한 원룸의 노숙인, 그가 법인 대표로 등장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 보이스피싱 조직의 총책을 수사하던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강수대) 수사2계(계장 고태완)는 2021년 11월 검거한 피의자 A씨의 압수물에서 수상한 범죄 흔적을 포착했다. PC에서 다수의 계좌를 관리한 정황이 담긴 파일을 발견한 것이다. 경찰은 이 계좌들을 통해 어떤 거래가 이뤄졌는지를 파헤친 끝에, A씨가 대규모 대포통장 유통조직의 계좌관리책(일명 열쇠쟁이)이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A씨 다음으로 경찰이 주목한 건 대구의 한 허름한 원룸에 살던 노숙인 B씨였다. 수사 결과 그는 여러 대포통장을 개설한 유령법인 중 복수의 법인 대표자로 등재된, 법인설립책이었다. 경찰은 그 밖에도 여러 다른 법인 등의 사업자로 총 32명이 등록됐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B씨에게 원룸과 주 20만원의 숙식비 등을 지급해 온 상선 2명을 특정했다. 총책 C씨와 지휘책 D씨였다.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12조원대 대포통장을 유통시키고 대여금으로 약 200억원을 챙긴 대구지역 범죄조직을 검거해 지난해 10월까지 구속 피의자 6명을 포함, 총 38명을 검찰에 송치했다고 19일 밝혔다. 사진은 경찰이 공개한 증거품과 범죄로 벌어 들인 현금 등의 모습. 사진 서울경찰청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12조원대 대포통장을 유통시키고 대여금으로 약 200억원을 챙긴 대구지역 범죄조직을 검거해 지난해 10월까지 구속 피의자 6명을 포함, 총 38명을 검찰에 송치했다고 19일 밝혔다. 사진은 경찰이 공개한 증거품과 범죄로 벌어 들인 현금 등의 모습. 사진 서울경찰청

두 사람은 각각 대구 지역 폭력조직 향촌동파와 동성로파 조직원이었다. 고향 선후배 사이인 이들은 교도소 수감 중 알게 된 지인의 소개 등으로 B씨를 포함한 노숙인 3명을 포섭했고, 여러 법인의 대표로 등재시켰다. 법인 명의 통장이 개인 명의 통장보다 개설 심사가 덜 까다롭고, 법인을 말소하지 않는 이상 또 다른 통장을 쉽게 추가 개설할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손쉽게 법인을 관리하기 위해 노숙인들을 사실상 원룸에서만 생활하도록 하며 감시했다. 또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모집한 20대 청년들도 여러 유령법인과 그 지점 사업자로 등록하며 범행에 끌어들였다. 법인 수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무실 임대차 계약서에 1개 호수의 부동산을 2개로 쪼개 기재한 뒤 사업자 등록을 하기도 했다.

수사망을 피하는 수법 역시 치밀했다. 구체적인 행동 수칙을 만들어 조직원들에게 공유했다. ▶대포폰을 주기적으로 교체해 사용하고 ▶사무실 앞 폐쇄회로(CC)TV나 차량 블랙박스를 수시로 확인하며 ▶사무실에 들어갈 땐 최대한 멀리 주차해 주위를 살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12조원대 대포통장을 조직적으로 만들어 유통시키고 약 200억을 챙긴 범죄조직의 총책이 지난해 7월 대구에서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 수사관들에게 체포되고 있다. 사진 서울경찰청

12조원대 대포통장을 조직적으로 만들어 유통시키고 약 200억을 챙긴 범죄조직의 총책이 지난해 7월 대구에서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 수사관들에게 체포되고 있다. 사진 서울경찰청

하지만 약 5개월에 걸친 경찰의 추적을 끝까지 피하진 못했다. 서울청 강수대는 19일 대포통장 유통조직 총책과 지휘책 등 상위 조직원 6명을 지난해 7월 구속하고, 이들의 지시에 따라 법인을 만들고 대포통장을 개설한 공범 32명도 모두 검거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30일까지 조직원 총 38명이 범죄단체조직·업무방해,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등의 혐의로 송치된 뒤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경찰 수사 결과 이들이 2019년 6월부터 약 3년간 설립한 법인은 총 528개, 법인을 통해 개설된 대포통장은 총 1048개였다. 통장 대부분은 인터넷 도박 사이트 운영자나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 등에 빌려줬고, 월 평균 170만원을 받았다. 이들이 챙긴 돈은 약 212억원, 대포통장으로 거래된 자금은 입금액 기준 약 12조8000억원에 달했다. 경찰에 따르면, 통장 입금액 기준으로 봤을 때 역대 대포통장 유통조직이 벌인 범행 중 가장 큰 규모다.

12조원대 대포통장 유통조직 총책 등은 노숙인(사진)에 원룸을 제공하고 숙식비 등 생활비 20만원을 지급하면서 통장 개설을 위한 유령법인을 설립하도록 했다. 사진은 범죄에 가담한 한 노숙인이 지난해 7월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 수사관들에게 체포되는 모습. 사진 서울경찰청

12조원대 대포통장 유통조직 총책 등은 노숙인(사진)에 원룸을 제공하고 숙식비 등 생활비 20만원을 지급하면서 통장 개설을 위한 유령법인을 설립하도록 했다. 사진은 범죄에 가담한 한 노숙인이 지난해 7월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 수사관들에게 체포되는 모습. 사진 서울경찰청

경찰 관계자는 “불법 수익 환수를 위해 전체 대포통장 계좌 중 566개에 대해 지급정지를 요청하고, 계좌 잔액 46억원과 현금 1억원 등 47억원에 대해 기소 전 몰수보전 조처했다”며 “현행 상법상 회사 해산 명령 청구는 이해관계인과 검사만 할 수 있으나, 경찰 수사 단계에서도 불법 목적 등으로 설립된 회사에 대해선 해산 명령 신청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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