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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대구 '불쏘시개 열차'…백발된 아빠는 아직 '불' 품고 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벌써 20년이네요. 지은이는 아래로 3살 터울 동생이 둘 있어요. 아이들도 부모 생각한다고 그러는지 그때 얘기는 잘 안 하지만, 제사는 꼭 와요. 내일도 아침부터 지은이 보러 가야지요.”

지난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참사로 딸 지은(참사 당시 25세)씨를 잃은 윤근(76)씨의 말이다. 꼬박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은씨 동생들은 결혼해 아이를 가졌고, 윤씨도 이젠 백발의 노인이 됐다. 하지만 유족들의 삶은 여전히 참혹했던 참사의 그날에 머물러 있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대구 지하철 참사 20주기 추모 기자회견에서 사고 당시 딸 윤지은씨를 잃은 희생자 유족 윤근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대구 지하철 참사 20주기 추모 기자회견에서 사고 당시 딸 윤지은씨를 잃은 희생자 유족 윤근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윤씨는 참사 20주년을 앞두고 생업인 작은 제조업 업체의 문을 완전히 닫았다. “20주년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참사가 잊히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면서다.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참사 20주년 기자회견에 참석한 그는 마이크를 잡은 손을 벌벌 떨고 연신 눈물을 흘리며 발언했다. 현장에서 만난 기자에겐 지은씨의 일기를 엮어 참사 다음해에 낸 책 『아빠, 나비집을 지어요』를 건넸다.

대구 지하철참사 20주기를 하루 앞둔 17일 화재 사고 현장인 중앙로역 참사 기억 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구 지하철참사 20주기를 하루 앞둔 17일 화재 사고 현장인 중앙로역 참사 기억 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하철 대폭 변했지만…전문가들 “아직 부족하다”

20년 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 정차 중이던 열차에서 건강 문제 등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김대한(당시 56세)이 불을 질러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다쳤다. 방화범 김대한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수감 중이던 2004년 8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참사 이후 전국의 지하철 역사와 열차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이 이뤄졌고, 안전 설비를 대폭 강화했다. 2005년엔 대구광역시가 782쪽 분량의 『대구지하철 중앙로역 화재사고백서』를 발간했다. 백서는 첫번째 시설미흡 사항으로 전동차 내장재를 지적했다. 이에 따라 대구시는 불에 잘 타는 우레탄폼 의자, PVC(폴리염화비닐) 바닥, 폴리에틸렌 단열재를 불연성 패드·알루미늄 의자와 합성고무 바닥, 유리섬유 단열재 등으로 바꿨다. 또 도시철도 1~3호선 91개 역사에 화재감지기 1만 3000여개를 설치했고, 전동차 출입문 열림 장치와 통신 장치 등도 강화했다.

지난 2004년 3월 18일 서울 지하철 7호선에서 운행을 시작한 열차. 불연내장재를 사용했고, 천장에는 화재 경보기가 설치됐다. 연합뉴스

지난 2004년 3월 18일 서울 지하철 7호선에서 운행을 시작한 열차. 불연내장재를 사용했고, 천장에는 화재 경보기가 설치됐다. 연합뉴스

서울교통공사도 2003년 9월부터 2371억원의 예산을 들여 전동차 내장재를 전면 교체했다. 이어 277개 역사 중 지상역 23개를 제외한 254개 역사에 화재대비마스크(방독면)도 비치했다. 역마다 평균 220개, 일일 수송 인원이 20만명 이상일 경우 350~600개가 놓인다. 2005년 1월부턴 지하철 역사 등 100명 이상이 이용하는 시설에 공기호흡기를 설치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지하철 화재 안전의 역사는 대구 지하철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다.

다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대비가 완벽한 건 아니라고 지적한다. 시설이 대폭 바뀌었지만, 피난 장비와 사전 예방 측면에서는 개선이 덜 이뤄졌다는 것이다. 채진 목원대 소방안전학부 교수는 “2021년 276명, 지난해 341명 등 여전히 해마다 수백명이 화재로 목숨을 잃는다. 대부분 유독가스로 인한 것”이라며 “최근 과천 방음터널 화재에서도 호흡보호장비의 중요성이 강조됐지만, 소방관이 주로 사용하는 전문 장비인 공기호흡기는 수가 부족하고 사용법이 충분히 전파되지 않았다. 또 산소를 제조할 수 없는 방독면도 수가 적은 데다 성능도 한계가 있다. 산소제조가 가능한 피신 장비를 충분히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대구 지하철참사는 단순 화재가 아니라 방화였다. 단순히 불‧난연 소재를 도입하는 것을 넘어 사전에 능동적으로 사고를 막을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안전테마파크 명칭 두고 논란…갈등도 여전

대구 지하철참사 20주기 추모위원회가 17일 대구 1호선 중앙로역 기억공간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있다. 뉴스1

대구 지하철참사 20주기 추모위원회가 17일 대구 1호선 중앙로역 기억공간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있다. 뉴스1

희생자 추모를 둘러싼 갈등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족들은 2008년 12월 개관한 대구 팔공산 동화지구 내 시민안전테마파크에 ‘2·18 기념공원’이라는 이름을 함께 표기하고, ‘안전상징 조형물’로 불리는 위령탑과 참사 희생자 32명이 묻힌 묘역의 이름도 추모의 뜻이 드러나도록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구시는 응하지 않고 있다. 또 주변 상인들의 반발 때문에 위령탑에선 2019년에야 처음 추도식이 열렸다.

지난 15일엔 대구 지하철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여의도에 모여 정부를 규탄하고 ‘올바른 추모사업’을 촉구했다. 이날 열린 ‘진상규명 되지 않은 참사들’ 토론회에서 김종기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세 참사 모두 현재 진행형이고 해결되지 않았다”며 “국가가 제대로 국가의 책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주장했다. 이정민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부대표는 “유가족이 진상규명의 목소리를 높이면 정부가 이상한 집단으로 매도하는,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대구지하철 참사 20주기를 앞둔 16일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추모공간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헌화하고 있다. 사진 대구시청

홍준표 대구시장이 대구지하철 참사 20주기를 앞둔 16일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추모공간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헌화하고 있다. 사진 대구시청

반면 홍준표 대구시장은 같은 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대구 지하철참사 추모식에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민노총, 시민단체 등이 모여서 매년 해오던 추모식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며 “보상과 배상도 충분히 이루어졌고 관계자들 처벌도 이미 이루어졌다”고 썼다.

대구 지하철참사의 재구성

2003년 2월 18일의 기록
▶오전 8시 30분
=방화범 김대한, 집 창고에 있던 자동차 세척용품통을 가방에 담아 집을 나선 후 대구 지하철 1호선 송현역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 7500원어치 구매
▶오전 9시 30분
=방화범 김대한 송현역에서 1079호 열차 탑승
▶오전 9시 52분
=전동차가 반월당역 지날 때 김대한이 주머니에서 라이터 꺼내자 주위 승객 “당신 왜 불장난해”라며 저지
▶오전 9시 53분
=중앙로역 도착 무렵 김대한이 플라스틱 통 뚜껑을 열어 라이터를 대자 착화, 불길 순식간에 전동차 전체로 확산. 일부 역무원이 소화기 분사했지만 진화 실패
▶오전 9시 57분
=반대 방향으로 운행하던 1080호 열차 대구역 출발해 중앙로역 승강장에 진입해 정차. 자동으로 출입문 열렸지만, 연기가 객실로 들어와 기관사가 즉시 출입문 닫고 출발 시도
▶오전 9시 58분
=전동차 전기가 연결되고 끊어지기를 반복하며 재출발 실패
▶오전 10시 2분
=운전사령실 늦은 승객 대피 지시
▶오전 10시 3분
=인근 소방파출소 및 구조대 현장 도착
▶오후 1시 38분
=화재 완전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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