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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프리즘] AI는 예술의 종말 부를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27호 30면

캐슬린 김 미국 뉴욕주 변호사·홍익대 겸임교수

캐슬린 김 미국 뉴욕주 변호사·홍익대 겸임교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괴한 조롱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뮤지션 닉 케이브가 그의 팬이 챗GPT를 이용해 작곡한 ‘닉 케이브 스타일’ 곡을 보고 외친 말이다. 이어 그는 “이제 초기 단계지만 AI 공포의 서막”이며 “아포칼립스(종말)가 오고 있다”고까지 했다.

챗GPT에 대해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인터넷만큼 중대한 발명으로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의 말대로 세상이 들끓고 있다.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곳이 예술계다. 챗GPT는 진정 예술의 종말일까. 이제 인간의 상상력과 표현력의 정수인 예술은 AI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만 것인가. 동굴벽화 이래 인류의 역사 내내 고민해 온 예술가들의 창작의 고통, 예술가만의 색채, 구성, 표현 등도 순식간에 AI에게 강탈당하고 만 것인가.

 예술은 인간본질에 대한 질문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 대체 안 돼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은 구글로부터 지원받은 2억여 장의 자연과 풍경의 이미지들을 퀀텀 컴퓨터를 이용, 움직이는 이미지로 재창조해 거대한 LED 스크린에 표출한다. 그에게 퀀텀 컴퓨터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10여 년 전부터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탐색해온 아나돌 같은 예술가들에겐 컴퓨터나 AI는 그저 예술의 잠재적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도구’일 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예술의 본질 말이다. 예술가의 개념이나 의도, 철학이 예술의 본질이라 했을 때 AI의 이미지 생성 과정을 예술이요, 예술 창작의 과정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찍어내는 모든 사진들을 사진예술이라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지 사진을 찍는 행위와 사진예술을 창작하는 행위는 다르다. “예술 창작은 그저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적 맥락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용하는지가 중요하다.” 아나돌의 말이다.

그렇다.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문답이다. ‘호모 파베르(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답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한 세기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사진기술이 등장했을 때다. 많은 이들이 ‘회화의 종말’을 선언했다. 하지만 현재가 증명하듯, 재현회화의 필요성은 줄었을지언정 사진기술은 한순간도 회화를 파괴한 적이 없다. 사진기술은 오히려 예술창작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예술가들은 늘 새로운 매체를 선택했고, 새로운 도구를 환영했다.

우리 시대 예술가들은 AI 연구의 태동기인 20세기 중반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을 ‘도구’로 이용하거나 ‘지시’와 ‘선택’을 통해 스스로의 의도와 개념을 구현했다. 따지고 보면 근대 이전에는 예술과 기술과 철학이 하나였다. 예술의 뿌리는 철학이고, 기술은 철학을 예술적 표현을 통해 구현하는 도구 또는 매체였다. AI는 되려 예술과 기술과 철학을 다시 하나로 묶는 방편일 수 있다. 나아가 AI는 현재와 같은 예술창작자와 테크니션의 협업 시스템 대신 ‘다빈치’형 예술가들을 출현시킬 것이다. 이용과 접근의 평등성으로 인해 예술‘가’의 범위를 확장할 수도 있다.

종말일 수 없다는 또 다른 논거가 있다. 아나돌의 말처럼 예술창작이란 그럴듯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과 다르다. 예술이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고통과 평화에 대해 통찰하고 또 통찰하는 일이다. AI의 생성물에는 신에 대한 반 고흐의 질문이 없다. AI의 생성물에는 박수근의 가난이 없다. AI의 생성물에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갖는 시대정신이 없다. 예술은 원시시대부터 비롯된 인간에 의한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 그래서 예술은 곧 인간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AI는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 예술가들이 가지고 놀 편리한 새로운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예술은 영원할 것이다.

캐슬린 김 미국 뉴욕주 변호사·홍익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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