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카와 아야의 ‘일본 뚫어보기’
한국에서도 슬램덩크 팬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지난 11일 기준 관객수 273만으로 한국에서 개봉한 일본 영화 가운데 역대 2위에 올랐다. 1위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2016)으로 379만 명이다. 일본에서 관객수 1000만을 돌파한 신카이 감독의 최신작 ‘스즈메의 문단속’도 3월에 한국에서 개봉할 예정이어서 또다시 기록적 히트가 나올지 기대된다.
나는 지난해 12월 일본에 들렀을 때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 두 편을 같은 날에 친구와 친구 아들과 함께 봤다. 친구는 나의 중학교 때 벗이고 그 아들은 현재 중학생이다. 슬램덩크는 1982년생 우리 세대가 중학교 때 대히트를 친 만화인데 친구 아들도 안다는 것이 신기해서 물어봤더니 “방송 애니메이션을 봤고 또래 친구들도 다 안다”고 했다.
학창 시절 ‘부활동’은 청춘의 대명사
일본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지난해 12월 3일 개봉했고 지난 7일에 흥행수입 100억 엔(약 963억원), 관객수 687만을 돌파했다. 중학교 때 친구와 함께 봐서 그런지 영화를 보면서 중학교 때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만화 ‘슬램덩크’는 1990~96년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됐다. 나도 주변 친구들도 당시 만화잡지를 정말 많이 봤는데 돌이켜보면 당시가 점프 전성기였다. 역대 최고 부수를 기록한 건 1994년 12월 20일 호로 무려 653만 부가 팔렸다.
만화 ‘슬램덩크’의 발행 부수는 누계 1억2000만 부를 넘는다. 다른 만화의 경우 독자층이 남녀로 갈리는 경우가 많지만, 슬램덩크는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 당시 누군가가 만화책을 사면 그걸 친구들 사이에서 돌려서 봤는데 수업 시간에 보는 학생이 많았다. 들키면 선생님한테 몰수당하는데 학기 말 부모님이 학교에 와서 선생님과 ‘삼자 면담’을 할 때 만화책 여러 권을 돌려줘서 집에서 혼나기도 했다.
중학교 때는 슬램덩크의 영향으로 농구가 유행했다. 농구를 하든 안 하든 농구화를 신었고 특히 나이키 에어맥스 인기가 많았는데 비싸서 도난당할까 봐 교실까지 가져와서 책상 옆에 두는 학생도 많았다. 농구부 선배들은 특별히 멋있어 보였고 남녀 모두 농구부에 입부하는 학생이 많았다.
이런 이야기를 한국에서 하면 신기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많다. 일본에서는 중고등학생 대부분이 ‘부(部)활동’을 한다. 나는 중학교 때 육상부였는데 주변 친구들도 농구부 외에 여자는 테니스부나 배구부, 남자는 축구부나 야구부에 많이 들어갔다. 대부분 매일 방과 후 부활동을 했는데 수업 시작하기 전에 아침부터 활동하는 부도 적지 않았다.
아무 부활동도 안 하는 학생은 ‘귀가부’라고 불렸다. 한국에서는 학원에 안 다니면 친구 사귀기가 어렵다고 들었는데 일본에서는 부활동을 안 하면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다. 2016년 운동부에 들어간 중학생의 비율은 남자가 75.1%, 여자가 56.4%였다. 여자는 취주악부를 비롯해 문화부에 소속하는 학생도 많았다. 대부분 학생이 운동부든 문화부든 부활동에 참가했다. 이 정도 많은 학생이 참가하면 취미 같은 가벼운 활동으로 생각하겠지만, 꽤 본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활동 시간은 평균 평일 약 2시간, 주말에도 활동하는 부가 적지 않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 추억의 큰 부분을 부활동이 차지한다. 부활동은 일본에서는 청춘의 대명사다.
예를 들어 ‘고시엔’이라고 불리는 고교야구 전국대회의 지방 예선에는 총 4000개 학교가 참가한다. 한국은 고등학교 야구팀이 100개가 안 된다고 들었다. 일본은 특별히 야구부만 많은 것이 아니라 축구부나 농구부도 대부분 학교에 있다.
그래서 슬램덩크의 부활동을 통한 성장스토리는 우리 이야기이기도 했다. 땀을 흘리며 훈련하고 대회에 나가는 긴장감, 이기고 지면서 울었던 경험뿐만 아니라 부활동을 통해 친구를 사귀며 싸우고 연애한 감정이 만화의 세계와 겹쳤던 것이다.
원래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강백호지만,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송태섭이다. 영화를 보고 집에 가서 남편한테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남편은 “사실 나는 미야기 료타(송태섭) 때문에 고등학교 때 농구부에 들어갔다”고 고백했다. 농구부였던 건 알고 있었지만 슬램덩크의 영향이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송태섭은 농구 선수치고는 키가 작다. 남편도 작은 편인데 “오히려 작다는 특징을 살려서 속도로 승부하는 송태섭을 보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한국 슬램덩크 팬들에게도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현실적인 성장만화’라서 좋아했다는 사람이 있었다. “강백호라는 풋내기 농구 선수는 4개월 동안 엄청난 성장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유행한 ‘드래곤볼’이나 ‘유유백서’ 같은 비현실적인 배틀만화와의 차이점이다. “농구를 모르는 강백호가 농구의 매력을 알아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부활동을 하든 안 하든 재미있게 느끼는 지점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친구는 “우리는 일본처럼 중고등학교 때 부활동을 못 했기 때문에 슬램덩크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영화를 계기로 다시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슬램덩크를 봤다는 사람도 많다. 나는 처음으로 한국어판 애니메이션을 봤는데 캐릭터 이름이 모두 한국 이름으로 돼 있어서 깜짝 놀랐다. 내가 보기엔 어색하지만, “현지화된 캐릭터들 이름이 캐릭터와 딱 떨어 맞았던 점이 더 기억에 남았다”고 평가하는 걸 들으면 한국 팬들은 일본 만화라는 건 알면서 한국 이야기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영화 ‘기생충’ 일본서 연극으로 공연
그런데 왜 지금 슬램덩크가 다시 인기를 얻는 것일까? 한국의 또래 친구는 “1990년대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도 있었고 요즘도 여러모로 살기 힘드니 그때 힘이 됐던 콘텐츠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최근 ‘타이타닉’이 한국에서 25년 만에 재개봉하고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지난해의 대히트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도,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일본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에도 90년대 당시 대유행한 ‘타이타닉’이 등장하는 걸 보고 오랜만에 극장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일 양국에서 동시에 90년대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 특히 젊은 세대는 공통의 작품을 접해 온 만큼 감성도 가까워진 것 같다.
최근 몇 년 동안엔 영화도 드라마도 한국 작품이 일본에서 인기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가 한국에서 관객수 100만 명을 돌파한 데 이어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까지 겹쳐서 일본에선 이런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요즘은 일본을 찾는 한국 관광객도 늘어나 일본에서는 “2019년의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먼 옛날 이야기 같다”고 보도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별로 와 닿지 않았던 분위기 변화가 문화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한국 원작 일본 드라마가 만들어진다거나, 한국 제작진이 일본 드라마 제작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도 요즘 많이 듣는다. 오는 6~7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일본에서 연극으로 공연되는 것도 화제다. ‘야키니쿠 드래곤’으로 알려진 재일코리안 정의신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으며 일본 배우들이 출연한다. 한·일 간에 서로 이렇게 많은 원작과 인재, 작품이 오가는 건 근래 들어 처음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올해도 기사로 쓸 만한 작품이나 통·번역으로 참여할 작품이 많아질 것 같아 더더욱 반갑다.
나리카와 아야(成川彩) 전 아사히신문 기자 2008~2017년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주로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동국대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프리랜서로 일본(아사히신문 GLOBE+ 등)의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칼럼을 집필 중이다. 2020년 한국에서 에세이집 『어디에 있든 나는 나답게』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