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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뺑이 1세대부터 명퇴 1순위까지…가는 곳마다 치였지만 이겨냈다, 58년 개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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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호 08면

SPECIAL REPORT 

‘할 일이 많아진다.’

격랑 헤치고 65세 ‘신노인‘ 된 시대의 상징

개띠, 그중 1958년생의 2023년 운세 중 일부다. ‘개띠, 그중 58년생’ 대신 우리는 ‘58년 개띠’로 부른다. 58년생도 자신을 기꺼이 그렇게 내세운다. 자부심이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58년 개띠’는 사회적 명사로 굳어졌다. 이들의 단단한 결속력이 빚은 결과다. 아니면 사회적 명사화 과정에 끈끈한 동지애로 묶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3대 결속 단체라는 해병대 전우회, 호남향우회, 고려대 교우회 못지않다. 58년 개띠인 이정현 전 새누리당(현재 국민의힘) 의원은 “결속력과 동질감이 참 남다르다”며 “동갑내기끼리 모두가 처음 봐도 친구라고 부른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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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58년 개띠가 올해 만 65세를 맞이한다. ‘공식 노인’이 된다. 한해 출생아 100만명(1960년 인구총조사 기준)을 처음으로 넘어서며 1차 베이비부머의 선두 주자인 58년 개띠. 저개발 개도국에서 태어났지만 선진국을 일군 압축성장의 주역은 뒷방 노인처럼 퇴장하는 것일까. 아니면 초고령 사회를 앞둔 한국의 미래를 또 바꿀 주역이 될 것인가. 중앙SUNDAY는 58년 개띠 15명을 만났다.

다 못 살아 궁핍했지만 궁핍 몰라

“여의도는 내가 만들었지요. 어려서 고생했지만 자랑스러워요.”권길룡씨는 일용직 노동자다. “못 배워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몸으로 일한다”고 말하는 권씨는 집안 사정으로 국민학교 입학 후 며칠 만에 그만뒀다. 7세부터 일을 했다. 대구에서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길거리 먹을거리라, 통계에 잡히지도 않지만 1960년대 후반 베스트셀러였다. 10세 무렵, 인천으로 올라와 효성동에서 자그마한 망치로 돌을 깼다. 그 돌은 1968년부터 시작된 여의도 개발에 쓰였다. 아파트 공화국의 서막이 그의 작은 손에서 비롯됐다. 권길룡씨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1965년에 중학교 진학률은 54.3%. 당시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지만, 권씨가 돌을 쪼개던 1968년에 폐지됐다. 고입 시험 폐지도 기다리고 있었다.

“중2에서 중3으로 넘어가는 1974년 겨울, 고입 무시험이 발표됐죠. 신났습니다.” 변기태 한국산악회 회장은 “당시에 고입 선행학습이 유행해서 이미 중3 과정을 마친 상태라 매일 산에 다녔다”며 “이른바 ‘뺑뺑이(고입 추첨제)’ 1세대라는 도움으로 지금 대한민국 산악계에서 이름 좀 알리게 된 셈”이라며 웃었다.

베이비붐은 콩나물교실을 불렀고, 2부제, 심지어 3부제 등교를 만들었다. 허삼복씨는 “오전반에서 오후반으로 바뀐 뒤, 형들과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놀다가 오후 등교 시간을 잊고 결석한 날도 많았다”고 기억했다.

58년 개띠는 어디서나 최고 경쟁률을 갈아치웠다. ‘어디를 가나 사람에 치이는 일은 우리들이 태어날 때부터의 숙명이었다.’ 58년 개띠 4명의 삶을 다룬 은희경의 소설 『마이너리그』의 한 문장이다. 58년 개띠는 숫자를 갈아탄다. 당시 대입 경쟁률 최고치를 기록한 77학번으로다. 77학년도 고등학교 졸업자 수 대비 대학 정원 비율은 17.8%. 5명 중 1명도 대학에 갈 수 없는, 역대 ‘최악’이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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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용케 대학에 들어갔어요. 부모님이 전쟁 통에 북에서 내려와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요.” 한모씨가 나고 자란 곳은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황해도 피난민들이 6·25가 곧 끝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잠시 머무른 곳’이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골목은 전후 베이비부머들로 넘쳤고 한모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궁핍했지만, 궁핍인 줄 몰랐다. 한모씨는 “주위를 보면 다 못 살았으니까 모두 그렇게 사나보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괭이부리마을은 부산 감천문화마을과 속초 청호동 아바이마을과 함께 실향민 마을로 꼽힌다.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 어려운 시절을 겪어. 그런데 그 어려움 속에 그냥 빠져 있기만 하면 도움이 안 되는 거야.” 한씨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마련했다. 부모님 부담을 덜어야 했다”고 말했다.

데모하다 입대, 데모 막는데 차출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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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새내기 77학번의 봄 캠퍼스에는 지옥의 낭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말기였다. 한씨는 “수업 일수보다 데모(시위) 일수가 많았고, 데모 경력으로 입대 후 최전방에 배치됐다”고 말했다. 58년 개띠는 79년 부마민주항쟁, 80년 광주민주항쟁 한복판에 섰다. 58년 개띠 한쪽은 시위 현장에서 화염병을 던지고, 한쪽은 진압 곤봉을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신대식(광주)씨는 1978년 입대했고, 경북 포항에서 해병대로 근무했다. 부마항쟁 진압군으로 부산 수영비행장에 있었다. 그는 진압 과정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5·18 광주항쟁이 벌어졌을 때는 전혀 몰랐다는 신씨는 “뒤늦게 휴가를 얻어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보니 내가 5·18 때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후회된다”고 말했다. 한상인씨는 “광주항쟁 직후 제대 특명이 안 떨어져서 보름이나 군 생활을 더 했다”고 밝혔다. 변기태씨는 “당시 대학생이 데모 현장에 안 나가면 이상할 정도”라며 “그런데 입대 후 내가 데모를 막는 데 차출돼 참 아이러니”라고 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 열어

30대. 87년 6월 민주화항쟁 넥타이 부대의 중심에는 58년 개띠들이 있었다. 58년 개띠 서홍관 시인은 ‘아빠는 안녕하다’로 당시를 전한다. ‘서울 하늘을 최루가스가 뒤덮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 아이의 잠자는 얼굴만 보는 날이 계속되면/ 낮에 집으로 전화를 한다…중략…오늘!/ 아빠는 안녕하다.’ 유신 말기부터 1987년 봄까지, 이렇게 58년 개띠의 20대는 민주화와 뗄 수 없었다.

“주산 부기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 취직하고 보니 대학 나온 언니들이 부러운 거예요.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김문희씨는 81학번이다. 58년 개띠 동갑보다 4년이나 늦다. 김씨는 “상고 나와서 취직 잘하면 됐지, 뭔 대학이냐고 부모님 반대가 심했다”고 말했다. 김씨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인 1975년에 대졸 이상 여성은 2.4%(남성 9.5%)에 그쳤다. 졸업 후인 1985년 대졸 이상 여성(남성 15.5%)은 5.2%로 두 배 이상 늘었다. 대학생 수가 1980년 59만5656명에서 1984년 126만6842명으로 4년 새 두 배 이상 증가할 정도로 대학 정원이 대폭 확대된 이유도 있지만, 바닥에는 교육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대학 정원 확대는 결국 ‘경제발전에 따른 고등교육 수요를 충족하기 위함(최강식 연세대 교수)’이었다. 배움에 목말랐던 김문희씨 같은 58년 개띠가 ‘대학 나온 여자’의 불을 지핀 셈이었다.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버스에 타면…음, 그냥 슬펐어요.” 김영숙(가명)씨의 말이다. 그녀를 ‘차장’ ‘안내양’ 혹은 비하해서 ‘차순이’라고도 불렀다. 대법원 자료에 따르면 1945년에 태어난 여성 중 가장 많은 이름은 영자. 순위는 정자·순자로 이어지며 ‘자(子) 시리즈’가 유행했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1960년 전후로 이별을 고한다. 58년 개띠 여성 중에는 영숙이란 이름이 가장 많다. 정숙·명숙도 많아 ‘숙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1970~80년대 만원 버스 안에서 “영숙아”라고 부르면 대여섯 명은 돌아본다는 우스갯말도 있었다.

그런데 왜 ‘~순이’로 불렀을까. 정찬일은 『삼순이-시대가 만들고 역사가 잊은 이름』에 ‘작명자들은 순한 여자가 되기를 바랐다.… 도시와 공장에는 ‘순이’들이 넘쳐났다. 어느덧 ‘순이’는 어린 직업여성의 대명사가 됐다’고 적고 있다. 버스안내양은 17~19세가 가장 많았다. 1973년 3만 명(이병태 한양대 교수 추정치)을 찍고 급격히 줄더니 1989년 사라졌다. ‘오라이’를 외치던 김영숙씨 같은 58년 개띠 여성들이 버스안내양이란 직업의 막차를 탔다. 버스에서 내린 ‘차순이’들은 ‘공순이’가 됐다.

이런 ‘순이’는 대한민국 산업화 밑바닥을 단단히 다졌다. 1975년 경제기획원의 자료를 보면, 15~24세 여성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은 40~50%로 대단히 높았다. 58년 개띠 여성 근로자들은 이 나잇대의 중간쯤이다. 한국의 경공업 중심 공업화에서 베이비부머 여성 근로자들은 핵심적인 노동력이었다. 수출 지향적인 섬유·의복·가발·신발·전기전자 등 경공업과 조립산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에서 여성 노동자가 크게 늘었다. 하지만 이후 산업이 중화학공업 위주로 재편되면서 생산직에서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월세, 전세를 거쳐 어떻게든 노력하면 집은 마련할 수 있었어요(한상인씨)” “힘들었지만, 성실하면 내 집은 생겼지요. 요새는 꿈도 못 꾸지만요(임모씨).” 인구 지형의 폭발력을 갖춘 58년 개띠가 만 30세를 넘기고 속속 가장이 된 1989년. 정부는 천지개벽에 가까운 조치를 발표했다. 일산·분당 1기 신도시 건설이다.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일군 때는 1994년. 58년 개띠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산악회 이끌고, 시니어 모델 활동도

런웨이에 선 한상인(오른쪽)씨. [사진 한상인]

런웨이에 선 한상인(오른쪽)씨. [사진 한상인]

40대. 1997년 외환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도성장의 전성기가 급격히 식은 것도 모자라 빙하기가 닥쳤다.

변기태씨는 외환위기 1년 전 투자신탁회사에서 나와 분양 사업을 했다. 외환위기 때 가장 타격받은 분야 중 하나다. 악수였고 패착이었다. 변씨는 “그때 진 빚을 25년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갚고 있다”고 밝혔다. 김문희씨는 “돈이 날아다녔다고 할 정도로 잘 됐다”던 학습지 교사 일을 접어야 했다. 가정마다 지갑을 닫았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다니던 임모씨는 “회사만 믿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40세부터 은퇴 준비를 해왔다”고 말했다. 한모씨는 “외환위기 직전에 외국계 회사로 옮겨 큰 탈은 없었지만, 이전 직장 부서 동료들은 모두 실직했고 아직 회복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밝혔다. 58년 개띠의 최대 위기였다.

당시 58년 개띠들은 공무원이건 회사원이건 고위직도 아니고, 갓 입사한 신입도 아닌 ‘중간급’이었다. 58년 개띠인 한수용 전 SK경영경제연구소장은 “외환위기 때 희생이 가장 컸던 세대이자, 희생을 강요해야 했던 세대”라고 말했다. 부모봉양과 자녀부양 사이, 4·19세대도 아니고 386세대도 아닌 낀 세대의 숙명이었을까.

50대. 2008년 금융위기는 외환위기를 용케 버틴 58년 개띠들을 다시 벼랑으로 몰았다. 구조조정과 명예퇴직 1순위였다.

“낀 세대가 어디 가겠어요. 60세 정년연장을 누리지도 못했어요. 아니, 그보다는 다른 일을 먼저 찾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한모씨는 만 55세인 2013년 퇴직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이렇게 밝혔다. ‘2010년 300인 이상 사업장의 평균 정년은 57.4세…명예퇴직 등을 감안하면 실제 퇴직 연령은 53세를 약간 넘는 수준.’ 58년 개띠 등 베이비부머들의 은퇴를 앞두고 2010년부터 본격화한 정년연장 논의를 촉구하는 2012년 자료였는데, 60세 정년은 2016년에야 도입됐다. 58년 개띠들은 20대에 부닥친 5공화국과 다른 공화국을 만난다. 이름하여 ‘치킨공화국.’ ‘베이비부머 은퇴로…2013년 21만명 수준이던 50대 창업자 수는 2017년 28만명으로 증가.’ 이렇게 분석한 KB금융그룹은 이들의 창업 메뉴 1순위로 치킨을 꼽았다. 그런데, 치킨집 창업보다 폐업이 많았다. 창업은 2014년 9700개에서 2018년 6200개로 감소한 반면 폐업은 해마다 8000개 이상이었다.

60대. 2018년, 60세 정년을 채운 58년 개띠 은퇴식이 곳곳에서 열렸다. “내가 닭띠도 아니고 치킨집은 무슨….” 유모씨는 자동차 세일즈를 하다가 60세를 채우고 퇴직했다. 기름처럼 달아오르던 치킨집 창업 대신 그는 세일즈로 얻은 ‘말발’로 은퇴자 커리어코치를 택했다. 공무원으로 일했던 한상인씨는 2018년 퇴직하자마자 시니어 모델 세계로 뛰어들었다. 정년은 끝이 아니었다. 한국CXO연구소가 2019년 11월 국내 1000대 기업의 반기보고서를 조사한 결과 대표이사로 기재된 CEO 1328명 가운데 58년 개띠가 93명(7%)으로 가장 많았다. 1961년생이 90명(6.8%)으로 뒤를 이었다.

그리고 65세. 2023년, 58년 개띠는 공식 노인이 됐다. 58년 개띠의 퇴장을 의미하는 걸까. 변기태씨는 1945년 만들어진 회원 6000명의 한국산악회를 이끌어야 하고, 한상인씨는 시니어 모델에 이어 교육강사로 활동하고, 신대식씨는 레미콘 차량을 더 몰아야 한다. 35년째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신용선씨는 철근을 어깨에 올리면서 “내 땀을 들여 만든 여의도 현대백화점, 타워팰리스 같은 곳을 또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전 세대에 비해 학력이 높고, 정보 접근·활용이 출중한(2020년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임정훈 등)’ 58년 개띠를 비롯한 베이비부머들은 노동시장에 재진입했거나, 재진입을 노리고 있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58년 개띠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상징적인 맏형이자 맏언니 격”이라며 “이들이 고령자로 분류되면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뒤 연령대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국제구호전문가 한비야씨는 자신이 속한 58년 개띠를 이렇게 요약한다.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온 장본인이라는 자부심이 58년 개띠에게 있다. 내가 국제구호를 할 수 있는 것도 격동의 시대를 거쳤기 때문이다. 나도 친구들도 어르신 그룹의 막내로 진입하면서 어르신 문화를 바꾸고 싶어한다. 왜냐고? 58년 개띠니까. 설렌다.”

지난 13일 오늘의 운세. 개띠 58년생. 아니, 58년 개띠. ‘할 일은 미루지 말고 실행.’ 아직도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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