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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마지막 스파이 소설에 어른거리는 '아버지', 완성은 아들 몫[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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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뷰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영국 정보부 내에서 가장 유능한 아랍 분석관으로 평가받는 데버라는 애국심이 투철하다. 노령에 암까지 걸렸지만 그녀는 죽는 날까지 국가에 대한 봉사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본부에 위험 신호를 보내온다. 손으로 쓴 편지를 사람(딸)을 통해 전달한다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그녀는 자신의 보안에 결정적인 하자가 발생했으니, 자택과 연결된 비밀 통신선을 즉각 끊어 줄 것을 요청한다. 본부는 뒤숭숭해진다. 데버라의 담당 영역(중동)도 문제지만, 그녀의 자택은 미국·영국의 공동 전략핵기지 바로 근처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런던에서 큰돈을 만지던 생활을 청산하고 연고도 없는 동부의 작은 마을에 내려와 서점을 차린 줄리언 앞에 이국적인 악센트를 쓰는 초로의 손님이 나타난다. “나는 자네 아버지를 잘 아네.” 아버지는 가족 전체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망나니였으므로 줄리언은 이 말에 경계심부터 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친구라는 에드워드가 풍기는 지성과 인품에 점점 호감을 품게 된다. 급기야 줄리언은 에드워드가 제안한, 서점의 한 공간에 희귀본 전시장을 만드는 일에 동의하게 된다. “자네가 이메일 주소를 만들면, 각국의 희귀본 딜러들을 찾아서 연락하는 건 내가 돕도록 하지.”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이야기는 빠르게 하나로 합쳐진다. 줄리언의 서점은 데버라 동네에 있고, 에드워드는 사실 데버라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은 ‘데버라 사건’을 조사하는 본부 요원이 처음부터 에드워드를 표적으로 삼는 것을 별로 감추지도 않는다. 폴란드 출신의 영국 정보부 요원이었다가, 지금은 어느 쪽에 충성하는지 확실치 않은 에드워드 말이다.

스파이 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1931~2020) 사진.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스파이 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1931~2020) 사진.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실버뷰』(원제 Silverview)는 스파이 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1931~2020) 사후에 미완성 원고로 발견되었다. 역시 작가인 아들 닉의 손질을 거쳐 2021년 영미권에서 출간되었다. 닉에 따르면 『실버뷰』는 쓰다가 만 소설이 아니다. 원고는 완성되어 있었다. 단지 르 카레가 6년 가까이 이 원고를 계속 수정하면서도 발표할 결심을 하지 못한 것뿐이다. 닉은 아버지의 원고에 창작자로 참여하기보다는 편집자적인 손질을 가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느 의미로 칠레의 소설가 볼라뇨(1953~2003) 사후 발견되는 미완성 작품들과도 비슷하다. 겉으로는 이미 완성되어 있고 정서까지 끝나 있지만, 좀 더 확장과 심화 작업이 있기를 기대하며 작가가 서랍 속에 넣어 놓은 작품 말이다.

'실버뷰'는 데버라와 에드워드 부부가 살고 있는 저택 이름이다. 『워더링 하이츠』, 『하워즈 엔드』 등 집 이름을 제목으로 택한 영국 소설들이 그렇듯 『실버뷰』 역시 ‘누가 영국을 상속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끝에 실버뷰를 물려받게 될 젊은이들은 앞 세대들보다 훨씬 솔직하고 관용적이며 다문화적이다. 이들의 영혼이 데버라와 에드워드 중 어느 쪽을 더 닮았는지, 작가는 명확하게 표시해 두었다.

읽다 보면 이 책이 어떤 의미에서 미완성인지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갑자기 사제직을 내던지고 가족을 버렸다고 소개되는 줄리언의 아버지는 그 뒤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리고 에드워드 역시 없는 편이 나은 아버지를 두었다고 소개될 때, 독자는 이 우연의 일치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와야 마땅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파이 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1931~2020)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스파이 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1931~2020)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그러나 소설은 침묵한다. 어쩌면 이 책은 르 카레를 평생 괴롭힌 ‘아버지 문제’를 청산하기 위한 작품이었고, 그는 이를 대작으로 완성시킬 영감이 찾아올 날을 조용히 기다렸던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날은 오지 않았고, 『실버뷰』 곳곳에 뿌려 놓은 그의 아버지의 형상을 수습하는 일은, 작가 르 카레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그의 아들의 손에 맡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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