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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아닌 한국교수 '영시' 논문, 국제최고저널에 8편 실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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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해 A&HCI급 국제전문학술지에 단독저자로 5편의 논문을 게재한 유지애 창원대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9일 오후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전민규 기자

지난해 A&HCI급 국제전문학술지에 단독저자로 5편의 논문을 게재한 유지애 창원대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9일 오후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전민규 기자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아이러니하게 인간은 혼돈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계에서 우울·불안·근심 같은 내면의 고통을 겪죠. 시에는 내적 고통을 겪고 극복하는 화자의 치유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그를 통해 삶의 본질을 깨닫는 것, 여기에 시의 가치가 있습니다.”

지난해 영국·미국에서 발간한 A&HCI급(Arts&Humanities Citation Index) 국제전문학술지에 논문 5편을 단독 게재한 유지애(53) 창원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의 말이다. A&HCI는 예술·인문학 분야 가장 권위 있는 인용 색인으로, 자연과학 분야의 SCI(Science Citation Index), 사회과학 분야의 SSCI(Social Sciences Citation Index)에 비견된다. 올해도 유 교수의 논문 세 편이 같은 급 저널에 게재 확정된 상태다. 비영어권 출신 학자로 영시 분야에서 괄목할 성과를 낸 그는, 연구에 몰입한 원동력을 시의 가치로 설명했다. 연구년을 맞아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있는 유 교수를 지난 9일 만났다.

지난해 학술지 '익스플리케이터(Explicator)'에 실린 유지애 창원대 교수의 논문 표지. 사진 유지애 교수

지난해 학술지 '익스플리케이터(Explicator)'에 실린 유지애 창원대 교수의 논문 표지. 사진 유지애 교수

지난해 게재된 유 교수의 논문들은 17~19세기 영시 속 인물을 입체적·창의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집중했다. 인간의 좌절감 등 부정적인 면을 부각했던 기존 이론을 반박하고, 고통을 뛰어넘는 긍정적인 의지에 주목했다. 17세기 영국의 대표 시인 존 던의 ‘트윅크넘 가든(Twickenham Garden)’ 속 성찬식의 의미를 분석한 것이 대표적이다. 사랑의 고통으로 방황하던 화자의 자기 파멸성을 은유한 것이라는 기존 주장과 달리, 유 교수는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적 순례로 봤다. 존 던이 성공회 사제였던 점, 비슷한 시기에 쓴 또 다른 시 ‘유 해브 리파인드 미(You have refined me)’의 화자가 숭고한 사랑을 노래한 점 등에 착안한 결과다. 이 논문은 ‘익스플리케이터(Explicator)’에 게재됐다.

“2016년 이 학술지에서 출판된 기존 논문은 화자의 어두운 면을 그렸어요. 저는 정반대의 주장을 담은 거죠. 투고하면서도 과연 받아들여질지 궁금했는데 1년 만에 채택됐다고 답이 왔어요.”

논문들의 주제는 유 교수가 주장하는 시의 가치와도 맞닿아있다. 인간의 내적 갈등은 불가피하지만, 시 속 화자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면서 삶의 지혜와 평안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12년 제 수업에 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 뇌 수술을 받아야 했던 학생이 있었어요. 두 달 정도 병원에 있어야 하는 그 친구가 다른 학생에게 제 강의 노트를 좀 빌려달라고 했다더라고요. 힘든 상황에서 시가 필요하다고요. 시에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죠.”

유 교수가 논문을 준비하며 필기한 노트. 사진 유지애 교수

유 교수가 논문을 준비하며 필기한 노트. 사진 유지애 교수

두 해 동안 총 8편의 논문이 A&HCI급 저널에 채택됐지만, 단기간에 이룬 성과는 아니다. 길게는 10년쯤 전부터 꾸준히 발전시켜 완성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카페든 KTX 안이든 한 문단씩이라도 글로 정리해 모았다. 국내에서 얻기 어려운 자료는 방학을 이용해 영국 옥스퍼드·요크대 도서관 등에서 직접 찾았다. 코로나19가 확산한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논문 집필에 집중했다.

1996년 영국으로 유학 가기 전 한국에만 살았던 그가 난해한 장르로 여겨지는 시를 전공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크·리버풀대에서 석·박사를 하던 시절, 영어를 더 잘하기 위해 영국 친구들과 시를 주제로 끊임없이 토론했다고 회상했다. 유 교수는 “한국인이지만 인간이라면 영시 속 감정을 느끼고 표현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영시가 어렵다는 편견에 대한 도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이번 성과가 국내 인문학 분야의 후학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인 학자도 세계적인 우수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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