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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대전환 시대의 대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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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세상은 늘 스스로의 동력을 가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 나간다. 때로는 서서히 큰 강물처럼, 때로는 가파른 계곡을 휩쓸고 도는 격류처럼. 그렇게 인간의 삶에 새로운 형태를 조화하고 거기서 파생하는 사건들이 결집하며 역사와 공동체의 모습은 바뀌어 나간다. 지금은 큰 강물의 시대라기보다 격류의 시대, 전환의 시대이다.

무엇보다 이 전환기를 추동해온 힘은 새로운 기술의 출현이다. 과학자와 기업인들, 그리고 대중이 참여하는 시장이 주도해 온 것이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삶의 형태를 열고, 새로운 삶의 형태는 새로운 욕구와 사회적 갈등을 낳게 된다. 그것이 국경을 넘으면 지구촌의 갈등이 되고, 이는 다시 새로운 세계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이 된다. 이를 조율하며 새 방향의 물길을 터 나가는 사람들이 지도자들이다. 지금 세계 각국은 어느 때보다 밝은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한국·남미 갈랐던 50년대 전환기
또다시 맞게 된 21세기의 갈림길
통합·협력, 합리성, 공정 경쟁으로
우리 잠재력 제대로 살려나가야

최근 방문한 남미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가 시작되던 때만 해도 미국보다 일인당 소득이 높은 세계 5대 경제 부국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에서 이 부유한 기회의 땅으로 대거 이민 와 오늘날에도 이들의 자손이 아르헨티나 시민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 나라가 지난 반세기 동안 9차례의 국가부도를 겪고 지금은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대내외 신뢰를 회복하고 경제 문제를 해결해 나갈지 모르는 딱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 들어서였다. 흔히 ‘페론이즘’이라 불리는 복지 포퓰리즘으로 쇠락한 나라로 인용되지만, 필자의 소견으로는 오늘날 아르헨티나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의 실제 가장 큰 요인은 세계 경제 전환기에 제대로 국가정책의 방향을 잡지 못했던 때문이다. 공동체 구성원은 함께 살아가야 한다. 빈민율이 40%가 넘는 나라에서는 분배 개선을 위한 재정 지출을 늘려야 사회가 안정되고 국민의 뜻을 모아갈 수 있다. 잘못되었던 부분은 나라가 부유할 때 국가가 복지 재원을 확충하지 못한 채 재정 적자와 화폐 발행에 의지해 복지 지출을 늘린 것이었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요인은 1950년대 세계 경제가 농축산물·광산물 중심의 1차 산업 교역에서 제조업 교역 위주로 전환하기 시작할 때, 그동안 축적한 부를 제조업 기술과 생산에 대한 투자로 연결해 산업구조 전환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브레튼우즈 및 가트(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가 자리 잡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세계 경제는 여러 차례에 걸친 관세 인하 협상으로 교역구조가 공산품 위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자원이라고는 인적 자원밖에 없던 한국도 이 기회를 활용해 신생 제조업 수출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와 남미는 당시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경제적 입지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국가로 전환하지 못하고 1차 산업 수출에 의존해 온 것이 오늘날 추락한 국가 위상을 갖게 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보다 크게는 국가지도자들이 이러한 전환기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국내 기득권 저항에 갇혀 있었던 이 나라의 정치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전환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불과 반세기 만에 엄청난 국가 위상의 차이를 가르게 된다. 세계는 지금 또 다른 대전환기에 처해 있다. 빅데이터, 인공지능을 비롯한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인간의 소통과 생활양식의 대변화, 지난 수세기 세계 경제의 패권과 국제질서를 주도했던 서양과 부상하는 동양과의 세력 재균형, 미·중 갈등과 신 냉전 시대의 개막, 기후변화로 인한 생산방식과 산업구조의 변화, 인구구조 변화 등이 한데 합쳐지면서 21세기 세계는 엄청난 도전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이 대전환기에 대한민국은 과거 어느 시대 못지않게 위기와 기회를 맞고 있다. 변화하지 못하면 쉽게 위기에 빠질 수 있지만, 오히려 지금 이 시대가 제2 도약을 위한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특히 우리는 디지털 혁명 시대에 유리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동서양 문명의 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반도체와 인터넷 강국이면서 미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낸 나라, 성리학을 중국보다 더 발전시켰으면서도 동양 주요국 중 압도적으로 많은 기독교 인구를 가지고 서양제도와 문화를 흡수해온 나라다. 독자적 지식의 깊이는 아직 부족할지라도 비빔밥처럼 동서양 문명의 융합과 동서양 세력 재균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20세기 전반 우리 민족이 겪었던 한과 비극적 시련이 20세기 후반 경제 기적의 동력이 되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K-컬처의 토양이 되었듯, 지금 우리가 제대로 눈 뜨고 할 일을 하면 그야말로 세계 중심 국가로 부상할 수도 있다.

이 기회를 거머쥐게 될 것인가, 아니면 고질적 분열과 갈등으로 이 시대를 허송하고 21세기 말 추락한 국가 위상을 후세가 보게 할 것인가. 통합과 협력, 사회 곳곳의 합리적 의사결정, 치열하면서도 공정한 경쟁을 정착시켜 우리의 잠재력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의 기본 과제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