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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로 '공공재' 될 바보가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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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부디렉터 兼 증권부장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윤석열 대통령의 ‘은행은 공공재’ 발언이 나온 지난달 30일 ‘2023년 금융위원회 업무보고 겸 금융시장 안정과 금융산업 육성을 위한 토론회’. 이날 금융위원회는 글로벌 금융회사의 아시아지역본부 국내 유치를 위해 세제 혜택과 금융·노동·외환규제 완화 등 과감한 규제 혁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보고했다. 보안법 시위와 코로나 봉쇄 등으로 그간 아시아 금융허브 지위를 누려 온 홍콩에서 이탈하는 글로벌 금융사를 잡겠다는 구상이다.

글로벌 금융사 유치 나서는 당국 #‘은행=공공재’ 주장, 커지는 관치 #세제 혜택, 규제완화로는 역부족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마크 테토 TCK인베스트먼트 공동대표도 “많은 은행과 투자자가 싱가포르로 이전했다”며 “글로벌 금융사가 홍콩 대신 한국에서 사업하도록 만들면 수십조 규모의 시장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며 윤 대통령에게 유럽과 중동 순방에서와 같은 ‘딜 메이킹’을 당부했다.

 윤 대통령이 “금융산업의 선진화, 국제화 또는 금융산업의 경쟁력 강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글로벌 금융사의 한국 유치 딜이 성사될 가능성은 크지 않을 듯하다. ‘은행은 공공재’라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한국 행을 주저하게 할 두려운 선언처럼 여겨질 수 있어서다.

 한국의 금융 환경은 글로벌 금융사나 해외 투자자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금융당국의 각종 규제와 정책은 뒤바뀌기 일쑤다. 배당 정책 등 민간 회사의 자율적 영역까지 간섭하는 일도 다반사다. 이런 목소리, 과장된 불만이나 볼멘소리가 아니다.

 은행이 낮은 예금금리와 높은 대출금리를 통한 이자장사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며 금융당국이 은행에 예금금리를 올리라고 ‘예대금리차 공시’로 등을 떠민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시중의 유동성을 빨아들이고 대출금리를 끌어올린다며 예금금리를 내리라는 주문을 이어갔다. 그 결과 기준금리보다 예금금리가 낮은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당국은 은행 등이 사상 최대의 실적을 이어가던 2021년 배당성향을 20% 이하로 유지하라고 권고했다. 코로나19 충격에 대비토록 대손준비금을 더 쌓으라는 것이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대출 만기연장과 원리금 상환 유예 조치가 이어진 데 따른 것이다. 갑작스러운 배당 정책 변경에 해외 주주의 불만은 커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근 금융지주사를 상대로 배당 확대 등을 요구하며 ‘은행주 캠페인’에 나선 행동주의 펀드 대표는 한국 정부와 금융당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의 불신과 불만을 전했다. 그는 “배당 확대 요구에 지지를 표하면서도 (실현 가능할지) 반신반의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한국을 제3세계 정부 보듯 말하는 그들에게 한국은 법치국가이고 선진국이라고 설명해야 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이런 상황에서 금융과 은행의 공공성에 대한 강조가 공공재로 명명되는 단계까지 이른 것이다. 은행은 라이선스(인가) 산업으로 과점 체제의 수혜를 누리는 데다 규제 산업이고, 부실화한 은행 등에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한 만큼 공공재라는 게 금융당국의 입장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토론회에서 “민간기업이기 때문에 은행의 경영 활동에 정부가 과거처럼 관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지만 공공재로 명명한 은행에 연일 날을 세우고 있다. 예대마진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둔 뒤 성과급과 퇴직금으로 나눠 갖는다며 비판한 데 이어, 지난 15일 제13차 비상경제 민생회의에서는 “물가 안정을 위한 고통 분담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주가 있는 민간 회사에 공공재라는 프레임을 씌워 금리 결정이나 배당 정책, 보수 체계까지 자율성을 침해하는 건 시장 경제의 논리에 비춰볼 때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 주주에게 돌아갈 몫(배당)과 예금을 맡긴 고객에게 돌아갈 몫(이자), 임직원에게 돌아갈 몫(성과급·퇴직금)까지 정부가 간섭하는 건 과도한 개입일 수 있어서다. 관치 논란이 빚어지는 이유다.

 뛰는 금리에 어려움을 겪는 국민을 위해 돈을 내놓으라며 은행을 때리는 건 은행의 공공성과 공적 책임을 감안해도, 재정의 영역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까지 은행에 넘기려는 것으로도 비친다. 정부와 당국의 서슬 퍼런 기세에 은행권은 바로 몸을 낮췄다. 수치 부풀리기란 지적에도 이날 은행연합회는 향후 3년간 10조원을 공급한다는 내용의 ‘은행 사회 공헌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은행=공공재’가 된 마당에, 세제 혜택과 규제 완화로 글로벌 금융사를 유인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제 발로 '공공재'가 되는 길을 선택할 바보는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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