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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품위 있는 죽음, 호스피스 더 늘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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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일학 연세의대 교수·한국의료윤리학회 총무이사

이일학 연세의대 교수·한국의료윤리학회 총무이사

건강과 행복을 오래 누릴 수 있는 삶이 가능해진 것은 깊이 감사할 일이지만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축복 된 삶의 마지막에는 한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두렵고 슬프고 어떻게든 피해야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그나마 받아들일 만하도록 하기 위해 인류는 오랫동안 고심해 왔다. 몇 가지 결론이 있다. 살아 있는 날을 즐기고 죽음이 다가올 때 담담히 맞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발로 서서 자기가 먹을 것과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고 그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지난 10여년 의학적 돌봄 분야에서 큰 발전이 있었는데 질병을 예방·치료하는 것만큼 생애 말기가 중요한 관심사가 됐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거와 달리 환자의 통증과 가족의 불편함을 줄일 수 있는 다양한 의학적 조치가 고안돼 활용되고 있다. 통증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시간이 줄어들고 품위 있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기회가 늘어났다는 말이다. 죽음에 저항하는 동시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삶을 누릴 수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의학이 이런 방향으로도 발전하면서 사회적인 지지가 이전보다 두터워졌다.

생애 말기 돌봄 서비스 아직 미흡
암 환자 경우에는 20% 안팎 그쳐
의사조력죽음보다 먼저 해결해야

호스피스

호스피스

그런데 이런 변화와 발전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여전히 일부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잘 고안되지 않고 오해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법과 제도다. 존엄한 대우를 받을 사람들을 법과 제도로 속박하면 안 되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인격체로서 존중과 돌봄을 받도록 법과 제도로 보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생애 말기 돌봄, 즉 호스피스(Hospice)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인과 의료기관 등에 법과 제도는 어떤 지지와 도움을 제공하고 있을까.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①환자가 연명의료에 대해 뜻을 밝힐 수 있는 방법과 절차 ②호스피스와 연명의료에 관해 설명을 듣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 ③환자의 뜻과 의학적 판단을 종합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연명치료를 결정하는 원칙을 안내한다.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따라야 할 절차와 권한을 통해 돌봄이 원활히 제공되게 하는 법이다.

그러나 생애 말기 돌봄에는 개선할 점이 많다. 생애 말기 돌봄 서비스를 받는 말기 환자 비율은 암 환자의 경우에도 20% 내외에 그친다. 시설과 인력이 그나마 갖춰진 상급종합병원에서도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의 뜻이 반영된 치료 결정은 50%에 못 미친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고 바라보는 우리의 학습 속도가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두려움을 극복하고 의학적 사실을 이해해야 하고, 자신이 바라던 죽음의 방식을 상상해 내고 그것을 밝히도록 존중하는 태도로 인내하며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록 쇠약하고 죽음을 앞두고 있더라도 살아있음이 분명한 환자에게 우리는 여전히 제대로 설명하고 환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여유 있게 기회를 주지 못한다. 생애 말기 돌봄이 출발점부터 문제가 있는 셈이다. 환자의 자기 결정 권리 보장을 좀 더 원활하게 하려면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환자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로 소통하도록 노력하고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일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이처럼 수준 높은 생애 말기 돌봄의 기반을 우선순위에 놓게 되면 최근 논의되는 의사조력죽음의 입법은 급박한 과제가 아니다. 생애 말기 돌봄을 많이 개선한 이후에 제도화를 시작할 일이라 생각한다.

국민의 80%가 의사조력죽음과 안락사에 우호적이라는 여론조사가 최근 나왔다. 그 조사는 죽음의 방식에 대한 결정권을 확인한 것이지 당장 법으로 구체화하고 실현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의사조력죽음이 나름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삶의 과정만큼 삶의 마무리가 비참한 현실을 속히 극복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과정에서 의사조력자살이 반드시 먼저 거쳐야 할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할 것인가. 의사조력죽음보다 시급한 일은 죽음을 앞둔 생애 말기가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인격체로 존중받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마땅함을 재확인하는 일이다.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의료와 복지 제도에 드는 자원을 확보하는 일을 우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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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학 연세의대 교수·한국의료윤리학회 총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