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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100, 한국 근육질 예능에 왜 그리스 조각과 신화가 나올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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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몸 겨루기 프로 ‘피지컬: 100’ 돌풍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어, 고대 그리스 조각과 정말 비슷하네’ 넷플릭스 오리지널 몸 겨루기 예능 ‘피지컬: 100’에서 결승전에 진출할 5인을 가리는 경기들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신들을 속인 벌로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면 떨어지는 돌덩어리를 영원히 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인간 시지프스(시시포스), 신들과 싸운 죄로 천구(天球)를 떠받치는 형벌을 받은 티탄(거인 신) 아틀라스 등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장면들로 경기를 기획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도 참가자들에게 그 신화를 묘사한 그림·조각과 비슷한 자세를 일부러 취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가자들은 전력을 당해 경기에 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신화 장면을 묘사한 고전미술과 무척 유사한 포즈 및 근육과 핏줄의 불거짐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참아내는 그 표정까지 말이다. 18세기 독일 미술사학자 빙켈만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버티어내는 영혼의 위대함을 절제와 균형으로 표현해냈다고 찬양한 고대 그리스 조각 ‘라오콘 군상’을 몸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경기

요즘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육체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 100’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육체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 100’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고대 그리스 조각 걸작 ‘레슬링 선수들.’ 원작은 사라졌고, 19세기 이탈리아 모작이다. [사진 소더비]

고대 그리스 조각 걸작 ‘레슬링 선수들.’ 원작은 사라졌고, 19세기 이탈리아 모작이다. [사진 소더비]

이 경기뿐만 아니라 ‘피지컬: 100’ 제작진의 고대 그리스 예술 오마주는 프로그램 시작부터 눈에 띄었다. 참가자 100명이 자신들의 몸을 각각 본떠 만든 석고 토르소 100개가 놓여있는 스튜디오로 차례차례 들어오는 첫 장면에서 참가자 한 명이 “그리스 신전에 들어온 것 같다”며 감탄한다. 이것이 제작진이 주고자 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또한 활을 당기는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조각이 중간중간 클로즈업된다.

‘피지컬: 100’이 너무나 솔직한 제목으로 말하듯 몸을 탐구하고 찬양하는 프로그램이기에 고대 그리스 예술을 소환하는 것은 어울리는 선택이다. 서구 문화의 양대 기둥 중 한 축인 기독교 문화가 육체를 정신보다 열등하고 속된 것으로 여겼지만, 또 다른 기둥인 그리스·로마 문화는 아름답고 건강한 육체에 아름답고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믿음으로 육체를 단련하고 이상화된 육체를 통해 정신성을 표현하는 것에 열심이었으니 말이다.

20세기 영국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누드(Nude)’는 ‘알몸(Naked)’과는 완전히 다른, BC 5세기 그리스인들이 창안한 예술 형식이며,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믿은 그리스인들은 인간 누드를 통해 ‘이상적인 형태의 아름다움’과 ‘힘,’ 그 힘이 좌절되는 ‘비극’까지 표현하려 했다고 했다. ‘피지컬: 100’에서 자신의 힘의 한계를 실감하며 토르소를 망치로 깨는 참가자들의 모습과 겹쳐지는 대목이다.

반면 ‘피지컬: 100’이 고대 그리스 예술이나 그것을 숭상한 서양 르네상스 시대 고전주의 예술과 확연히 갈라지는 부분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고전주의 예술가들은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힘과 고귀한 정신을 오로지 서양 남성의 신체로만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이상화한 신체는 특정 비례와 균형을 따른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피지컬: 100’의 석고상. [사진 넷플릭스]

‘피지컬: 100’의 석고상. [사진 넷플릭스]

‘피지컬: 100’이 프로그램 초반에 뛰어난 체형과 외모를 지닌 남성 출연자들을 공개할 때만 해도, 서양 고전주의의 이상적 미에 가까운 한국 남성들을 내세워 아시아 남성의 피지컬에 대한 서양인들의 고정관념을 깨려는 시도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피지컬: 100’의 의도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피지컬: 100’ 참가자들은 키와 몸무게와 체형이 다양하며 여성도 포함되어 있다. 처음에 그저 양념 정도로 출연한 것이 아닌가 했던 여성 참가자와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형의 남성 참가자들은 경기가 펼쳐지면서 놀라운 능력과 근성을 보여주었다.

서양 남성의 전형성 깨뜨려

독일 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1863~1928)의 그림 ‘시시포스(시지프스).’ [사진 소더비]

독일 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1863~1928)의 그림 ‘시시포스(시지프스).’ [사진 소더비]

‘피지컬: 100’의 ‘시지프스의 형벌’ 게임. [사진 넷플릭스]

‘피지컬: 100’의 ‘시지프스의 형벌’ 게임. [사진 넷플릭스]

경기는 반전의 연속이었고, 덩치와 완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해 보이는 사람이 많은 팀이 그렇지 못한 팀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게임 종류와 환경에 따라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몸이 각기 달랐다. 하지만 일관되게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투지와 근성이었다. 미세한 차이로 승패가 갈렸지만 패배자에게도 감탄이 나오는 경기가 한둘이 아니었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고대 그리스인들로부터 신체 단련 찬양과 신체를 통한 정신의 표현을 이어받되 참가자 100명의 다양한 몸이 모두 아름답고 강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서양 남성의 전형적인 몸으로만 이상적 미와 힘을 구현하는 고대 그리스 예술의 전통을 깬 것이다. 이것에 고전주의 예술 전통에 익숙한 서구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호응하면서 이 예능은 78개국에서 TV쇼 시청 10위 안에 들었다.

하지만 인기가 시청자의 운동 욕구로 이어지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인간의 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쓴 고통의 역사이자 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라는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간식과 야식을 끊고 피트니스 클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돈과 시간이 있어야 몸을 만들지”라며 고개를 내젓는 사람들도 많다. 몸은 노력에 정직하지만, 돈과 시간이 없으면 그 노력을 할 여유가 없는 것도 작금의 현실이니까.

의도한 ‘오징어게임’, 의도치 않은 ‘더 글로리’

‘피지컬: 100’이 특히 인기 많은 나라 중 하나가 영국이다. 지난주 중반 영국 넷플릭스 TV프로그램 부문에서 영어 드라마와 쇼를 모두 제치고 시청 1위를 차지했다. 정통 매체들도 진지한 논평을 남기고 있다.

일간지 ‘가디언’은 두 가지 면에서 극찬했다. 첫째, “한국에서 가장 육체미학적으로 위압적인 사람 100명을 모아서, 그들 중 누구에게도 유리하지 않은 운동 경기를 설계하고, 디스토피아 SF 스릴러 같은 스토리텔링으로 엮는” 엄청난 장인의 기술을 발휘해서 “‘오징어 게임’과 ‘글래디에이터’의 교배”를 이루어냈다고 평가했다.

둘째, 참가자들이 미국 리얼리티쇼에서와 달리 서로를 존중하고 겸손해서 사랑스럽다면서 따라서 “TV가 불쾌하게 폭력적인 시대에 육체적 거물들이 모래밭에서 럭비 태클을 하는 쇼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착하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일간지 ‘더 인디펜던트’의 평가도 주목된다. ‘피지컬: 100’이 ‘오징어 게임’에 버금가게 살벌하다고 보면서, 이것은 넷플릭스 전략의 일환이라고 냉정하게 분석했다. “넷플릭스는 시청자들이 ‘피지컬: 100’을 보면서 ‘오징어 게임’을 떠올리기를 원한다”며 “아무도 죽지 않는 건 자명하지만, 상금을 타기 위해 ‘최후에 한 명만 남을 때까지 극한의 생존경쟁’을 하게 된다. 특히 불편했던 한 전투에서는 남성 참가자가 여성 참가자의 가슴을 무릎으로 누르는 장면도 나왔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인디펜던트는 ‘피지컬: 100’의 인기가 넷플릭스의 다른 프로그램 중 연애 리얼리티쇼의 ‘오징어 게임’이라 불리는 ‘퍼펙트 매치’와 지금 촬영 중인 ‘오징어 게임’ 리얼리티쇼 버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내년에 나올 ‘오징어 게임’ 시즌2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게 하려는 게 넷플릭스의 큰 그림이라고 보도했다. 더욱이 넷플릭스 연애 리얼리시티쇼 ‘솔로지옥’에 나왔던 출연자가 ‘피지컬: 100’에 나왔고 다른 리얼리티쇼에도 교차 출연자가 많아지면서 “넷플릭스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구축되는 판이라고 분석했다.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며 예상 밖의 반응도 나왔다. 여성 참가자 중 한 명이 과거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주장이 지난 14일에 제기되면서, 시청자들이 학교폭력 피해자의 복수극인 넷플릭스 히트 드라마 ‘더 글로리’를 떠올리기도 했다. 피해자라고 밝힌 익명의 네티즌은 이렇게 썼다. “(학폭 가해자가) 멋진 사람이라며 칭찬받고 있는 글을 보자마자 손이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더 글로리’라는 학교폭력을 주제로 한 드라마를 흥행시킨 넷플릭스의 자체 프로그램에 학폭 가해자가 나온다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피지컬: 100’ 제작진은 관련 사실을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아직 주장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진실인 경우, 그리고 피해자가 요구한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또 프로그램 측의 적절한 조치가 없다면, ‘피지컬: 100’은 또 다른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