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현장에서] 또 불거진 추모시설 갈등…악순환 끊어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6일 오후 서울광장에 설치된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한 추모객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16일 오후 서울광장에 설치된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한 추모객이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면 참 안타깝기는 한데 마냥 저렇게 둘 수도 없고….”
16일 오전 7시쯤 서울광장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 앞. 한 중년 남성이 전화 통화 중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의 말은 서울광장 분향소가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추모·위로의 공간이어야 하나 지난 4일 기습 설치된 불법적 시설이어서다.

같은 시각 분향소엔 유족과 자원봉사자들이 묵묵히 조화를 든 채 조문객을 기다렸고, 서울광장 주변 곳곳엔 4~5m 간격으로 경찰 기동대 인원들이 배치돼 있었다.

분향소가 기습 설치된 지 2주 가까이 됐지만 이날은 유독 긴장감이 흘렀다. 전날 서울시가 분향소 철거 행정대집행에 착수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법상 행정대집행은 일출 전·일몰 후에는 할 수 없지만, 해가 뜬다면 언제라도 가능하다. 시는 이미 2차례 계고장도 보냈다. 유족 측은 분향소를 반드시 지켜내겠단 입장이다. 양측의 갈등은 내재해 있다. 최악의 상황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하지만 시와 유족 간 소통은 ‘뚝’ 끊어진 상태다.

16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설치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 주변에 경찰이 배치돼 있다. 뉴스1

16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설치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 주변에 경찰이 배치돼 있다. 뉴스1

서울시-유족, 계속된 대립

서울시는 자진철거를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한다. 반면 유족은 서울시가 일방적으로 녹사평역을 추모 공간을 정해놓고 ‘지하’로 유족을 몰아넣고 있다고 맞선다.

서울시와 유족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공간 논의는 지난해 12월 21일부터 시작됐다. 서울시는 “추모 공간을 만들어달라”는 유족의 요청에 따라 장소를 찾아 나섰다. 그러자 유족은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 인근의 공공건물을 언급했다.

이후 녹사평역이 결정됐다. 하지만 이게 갈등의 씨앗이 됐다. 서울시는 “유족이 먼저 용산구청과 녹사평역을 제안해 녹사평역을 (추모 공간으로) 준비했다”는 입장인 반면, 유족 측은 “(녹사평역은) 임시로 있을 장소를 말한 것이지 (정식) 추모 공간으로 요청한 건 아니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유족은 “공원 분향소 설치를 요청했으나 시가 불허했다”고 했고, 서울시는 “공원은 시민 모두의 장소”라고 맞섰다.

가족을 떠나보낸 유족과 서울시 모두 비통의 공감대는 흐른다. 그러나 이처럼 추모 공간을 어디에 두느냐를 놓고선 생각이 너무 다르다.

희생자 추모는 뒷전으로

유족은 서울시의 녹사평역 외 대안 제시 요청에 광화문광장 또는 서울광장만을 추모 공간으로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 1007명 중 60.4%가 광화문·서울광장 분향소 설치에 반대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서울시의 의뢰로 진행된 조사라 하더라도 선뜻 무시하긴 어려운 수치다.

서울시도 “지속적으로 (유족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했지만, “지금 당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청사에서) 내려오라(15일 분향소 앞 기자회견)”는 유족의 말엔 답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59명의 희생자를 기리고, 추모하는 건 계속 뒷전으로 밀리는 분위기다. 분향소 인근엔 이태원 참사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의 피켓을 든 사람들이 방송사 카메라에 비치기 위해서 종종 기웃거리곤 한다. 서울시와 유족 사이 갈등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걸 노린 것으로 보인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故) 이지한씨의 아버지인 이종철 유가족협의회 대표가 16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설치된 분향소에서 편지를 접어 영정사진 사이에 넣고 있다. 뉴스1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故) 이지한씨의 아버지인 이종철 유가족협의회 대표가 16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설치된 분향소에서 편지를 접어 영정사진 사이에 넣고 있다. 뉴스1

화합 없인 갈등만 계속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참사에 대한 기억과 교훈은 흐려져만 간다. 서울시와 유족 양측 모두 지금까지보다 더 진취적인 자세로 소통하는 게 필요하다. 문헌학자인 김시덕 박사는 “서울시는 치안에 실패했다는 책임감을 잊으면 안 되겠고, 유족은 추모 활동에 집중하는 것만이 시민 전반의 동의와 공감을 얻을 수 있음을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와 유족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과 인근 상권 등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추모 공간 마련이 필요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추모 위령탑은 주민들의 ‘땅값 하락’ 우려로 사고가 일어난 곳에서 4㎞ 이상 떨어진 엉뚱한 곳에 있는데, 삼풍 사고 유족은 ‘잊힘’을 두려워하고 있다.

추모의 장으로 변한 미국 9·11 테러 현장 ‘그라운드 제로’와 같이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 가능한 공간이 마련되면 적어도 지금보단 이태원 참사를 더 제대로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 시작점이 서울시와 유족의 극적 협의가 되길 기대한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