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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딸은 콜록콜록…봄과 먼 쪽방촌 "난방비 지원도 소용 없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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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서울 동자동 쪽방촌에 나란히 붙어있는 에너지바우처 신청 안내문과 월세 세입자 모집 팻말. 서지원 기자

14일 서울 동자동 쪽방촌에 나란히 붙어있는 에너지바우처 신청 안내문과 월세 세입자 모집 팻말. 서지원 기자

"돈이 많이 들어 난방을 덜 하니까 아이가 한 달째 감기를 달고 삽니다."

강원 춘천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 이모(45)씨는 연이은 한파와 치솟은 난방비 때문에 올겨울을 나는 게 유독 힘겹다. 생필품과 다름없는 등유와 LPG, 전기 어느 하나 오르지 않은 게 없다. “늦가을부터 초봄까지 보일러를 돌리는데 그간 200만원도 안 들었던 보일러용 등유비가 이번에는 330만원을 넘길 게 확실하다”고 이씨는 말했다. 전기를 최대한 아끼는데도 지난달 요금으로 7만원이 나왔다. 온수·취사용인 LPG도 1년 전엔 3만 원대(20㎏ 가스통)였지만 지금은 4만8000원씩 한다.

집이 워낙 허름해서 추운 데다 거동이 불편한 구순 어머니, 어린이집 다니는 6살 딸도 있지만 난방은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씨의 어린 딸은 연신 콜록거렸다. 그는 “정부가 지원하는 등유 바우처가 추가로 나왔어도 피부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며 “지원 확대라곤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럴 거면 그냥 안 주거나 아예 정부에서 기름을 대신 넣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달 ‘난방비 폭탄’ 논란이 터지자 서둘러 취약계층 보듬기에 나섰다. 모든 기초수급자와 차상위계층에 최대 59만2000원의 에너지바우처와 도시가스 요금 할인 지원을 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지난 15일 열린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선 등유·LPG를 쓰는 기초수급·차상위 가구에 동일한 금액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씨 같은 취약계층은 여전히 힘든 겨울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다. 이달 초부터 추위가 풀리며 난방비 부담이 줄었다지만 이들의 체감온도는 아직 ‘영하권’이다. 크게 늘어난 난방비를 정부 지원이 제때 메워주지 못 하거나 턱없이 부족해서다.

지난 5일 서울 중구의 한 주택가에 가스계량기가 설치돼있다.  뉴스1

지난 5일 서울 중구의 한 주택가에 가스계량기가 설치돼있다. 뉴스1

서울에서 15살 딸과 사는 기초수급자 이모(41)씨는 지난달 받은 고지서에 난방용 가스요금이 11만6000원 넘게 나온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지난해 1월엔 2만원 아래였는데, 1년 새 거의 6배로 뛰었다.

예상을 넘는 난방비에 이씨 가족의 기존 에너지바우처 지원액은 이미 바닥났다. 그나마 바우처 추가 지원을 받게 됐지만, 가스비가 얼마나 나올지 몰라 지난달 이후 난방을 최소화했다. 이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일도 거의 못 나가서 생활비 부담도 크다. 그는 “집에서 양말 신고, 쌍화탕 데워 먹으면서 버텼다. 겨울 시작되기 전부터 바우처 지원액이 크게 늘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을 안 졸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취약계층이 모여있는 지역에도 봄이 오긴 멀었다. 14일 서울 동자동 쪽방촌, 다닥다닥 붙은 방들이 마주 보는 건물 복도에선 난방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에너지바우처 신청을 알리는 안내문이 쪽방촌 곳곳에 붙어있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바우처를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야 신청한 경우도 꽤 있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주민은 “한 달에 방세 40만원 내는 것도 부담인데, 한두 달 뒤엔 집주인이 전기·가스요금 때문에 방세 올려달라고 할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14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의 한 주택에 연탄이 쌓여 있다. 뉴스1

14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의 한 주택에 연탄이 쌓여 있다. 뉴스1

아동복지시설 상황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학대·빈곤 아동 등을 소규모로 보호하는 그룹홈(공동생활가정)은 다른 시설보다 힘겨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한 곳당 평균 5명 이상 돌봐주는 그룹홈은 전국 400여 곳에 달하는데, 다세대·단독 주택이거나 등유·LPG를 쓰는 곳이 많다. 지난해보다 30~40% 이상 난방비가 늘면서 그룹홈의 운영비 부담도 커졌다. 지난달 정부의 특별 지원금이 나왔지만 일회성이라 난방비 폭탄을 막기엔 부족하다.

그룹홈은 운영비·아동 생계비 등 정부 지원금, 기업 등의 후원금에 의존한다. 하지만 후원받기 쉽지 않다 보니 아이들 양육에 필요한 생계비를 끌어다 난방 비용을 내는 식으로 버티는 게 부지기수다. 이재욱 한국아동청소년그룹홈협의회 기획정책팀장은 “운영비 현실화가 안 되니 사정은 늘 어렵지만, 아이들을 위해 난방은 계속해야 한다. 이번 겨울은 어떻게 버텨도 다가올 여름이나 겨울이 또 걱정”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비싼 에너지’가 이어지면 더운 여름엔 냉방비, 추운 겨울엔 난방비 문제가 반복되는 건 불가피하다. 이 때문에 취약계층 지원은 단기성 대책에 그치지 말고 내실 있게 다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송현수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서울지역본부 사회복지사는 “취약계층에게 난방은 생존권과 직결된다. 에너지 빈곤층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전수조사를 해서 일괄 지원하는 식의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용호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취약계층 냉·난방비 문제를 풀려면 근본적인 주거 환경 개선이 동반돼야 한다. 에너지바우처도 기준을 유연하게 바꿔 지원을 늘릴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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