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모녀지간 잘라내라”…‘칼’ 주러 왔다는 예수의 속뜻

  • 카드 발행 일시2023.02.18

㉑ 예수는 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했을까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첫 구절부터 당혹스럽다. ‘예수=평화’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예수 자신은 ‘예수≠평화’라고 말한다. 오히려 ‘예수=칼’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첫 물음이 올라온다. ‘예수가 말한 평화란 대체 뭘까?’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르다. ‘나의 눈’에는 지켜야 할 평화로 보이지만, ‘예수의 눈’에는 부수어야 할 평화로 보이는 것. 그것이 대체 뭘까. 이런 물음의 오솔길을 따라가 본다.

예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했다. 칼에 담긴 깊은 의미는 뭘까. 백성호 기자

예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했다. 칼에 담긴 깊은 의미는 뭘까. 백성호 기자

그런데 물음을 따라간다고 해서 바로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내 안으로 던져놓은 물음을 ‘궁리(窮理)’해야 한다. 닭이 알을 품듯이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사유해야 한다. 사유를 통해 물음의 두레박은 더욱더 깊이 내려간다. 예수는 이어서 말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이제 좀 더 명확해진다. 예수가 칼을 내려치는 곳은 나와 아버지 사이다. 딸과 어머니 사이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다. 그 사이로 예수는 칼을 내려친다.

왜일까. ‘예수의 눈’은 둘이 따로따로 떨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물음이 좀 더 깊어진다. ‘나와 아버지 사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아버지는 나의 뿌리니까.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왔고, 아버지로 인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 딸과 어머니 사이도 마찬가지다. 이미 가족이 된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도 그렇다. 부모는 내가 태어난 고향이자 근원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예수는 그런 상식을 향해 칼을 내려쳤다. 왜 그랬을까. 예수는 왜 이 관계들이 떨어져야 한다고 봤을까?’

예수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랐던 이스라엘 나자렛의 골목길. 어린 예수는 이 일대를 뛰어다녔을 터다. 백성호 기자

예수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랐던 이스라엘 나자렛의 골목길. 어린 예수는 이 일대를 뛰어다녔을 터다. 백성호 기자

그리스어 성경에서 ‘칼’은 ‘마카이라(machaira)’이다. ‘칼(sword)’ 혹은 ‘싸움(fight)’을 뜻한다. 예수는 그것을 주려고 했다. 그것이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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