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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차이나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조선이 식민지가 된 책임은? 역사의 정치적 해석은 위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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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치권에서 제기된 식민지 책임론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근 정치권에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제기되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사회적 관심을 끄는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에서 논쟁이 시작되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과연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을 하면서 논쟁이 진행되었는지 의문이다.

19세기 말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였다. 수백 년 간 계속되었고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신념이 하루아침에 바뀌고 있었던 시기였다. 『월남망국사』가 베스트셀러였던 시대였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도 당시를 평가하고 앞날을 설계하기에 너무나 힘들었겠지만, 150년이 지난 현재의 역사가들 역시 이 시기를 평가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혼돈의 19세기 말, 숱한 요인 얽혀
일본 책임론, 조선 무능론만 대비

일본의 군국주의 읽지 못한 조선
청나라의 속국 정책에 크게 반발

대한제국 뒤늦은 개혁정책 한계
학계와 시민사회 인식차 좁혀야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었던 구한말

1894~95년 청·일 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가 묘사한 당시 한반도 주변 상황. 일본·중국·러시아가 물고기(조선)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중앙포토]

1894~95년 청·일 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가 묘사한 당시 한반도 주변 상황. 일본·중국·러시아가 물고기(조선)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중앙포토]

이 시기를 바라보면서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논쟁점은 동아시아 국가 중 일본만이 근대화에 성공한 원인과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책임 소재 문제였다. 근대화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세력과 식민지화를 주도한 세력이 다르기 때문에 두 논쟁은 다른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근대화의 성공이 제국으로, 근대화의 실패가 식민지화와 반(半)식민지화를 야기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함께 해석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조선의 식민지화 책임 문제는 크게 일본의 책임론과 조선 정부의 무능론으로 나뉘었다. 주로 국내 학자들은 일본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본이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부터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 대한 개입,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결국 을사늑약과 강제합병조약으로 귀결되었다.

해외 학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당시 일본 문서들을 보면 일부 정치인들의 ‘정한론’을 제외하고는 19세기 말까지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 속에 한국의 식민지화라는 단어를 찾기 쉽지 않다. 이들은 일본의 한반도 내정 개입이 조선을 강한 국가로 자립하게 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조선이 완충지대가 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한다. 조선 정부는 떠 넣어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화도 조약과 시모노세키 조약

물론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말 일련의 과정을 보면 실효성이 없다. 무엇보다도 시모노세키 조약의 1조는 이러한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청·일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조약이다. 그런데 그 전쟁은 한반도에서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서 맺어진 조약의 1조는 강화도 조약 1조와 함께 “조선은 독립국”이라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단지 두 조약 간의 차이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청나라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강화도 조약에는 없는데, 시모노세키 조약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내용은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 온 동아시아에서 중국 중심의 국제 관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중국 스스로 인정한 것이었다. 일본의 출정선언이다.

아울러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때 일본의 대규모 파병과 함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개입했다는 일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아무리 이웃 나라 정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라도 왕비를 죽이고, 외교권을 빼앗고, 왕을 폐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할 수는 없다. 기본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악질적인 식민지화 과정이었다.

사태를 악화시킨 청의 개입

청에는 책임이 없었는가? 동아시아에는 수백 년 동안 조공관계가 지속하였다. 이는 강대국의 옆에 있는 약소국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하는 관계였다. 그렇다고 직접 통치를 하는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는 아니었다. 특별한 조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냉전체제에서 약소국들이 미국과 소련에 편승했던 것과 유사했다.

냉전체제 하에서의 편승은 조공이 없었지만, 대신 세계무역기구나 국제통화기금의 규칙을 따르면서 미국이 중심이 된 안보체제 안에 있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 그런데 임오군란으로부터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오만해진 청나라는 천 년이 넘도록 이어져 오던 전통적 조공관계를 뒤집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이자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그랜트의 중재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류큐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었던 중국의 지도자 리훙장은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개입하였고, 조청수륙무역장정을 맺도록 강요하였다. 장정의 내용에는 조선을 ‘속국’으로 규정하였고, 조선 왕의 지위를 자신과 같은 지위, 즉 북양대신 수준으로 깎아내렸다.

미국·러시아가 도울 수 없는 상황

중국이 전통적 관계를 깨고 스스로 제국이 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조선 내에서 반발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근대화를 추진했던 지식인들은 시모노세키 조약 후 중국의 사신을 맞이했던 곳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의 위험성을 보지 못하고 청의 위협과 조선 정부의 무능만을 봤다.

물론 조선 정부가 무능하지만은 않았다. 당시 중국의 몰락과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를 보면서, 자립을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했고, 미국·러시아와의 외교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한반도에 관심이 없었던 미국, 내부 문제로 무너져가고 있었던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었다.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도 이미 너무 늦었다. 19세기 말 조선 정부는 농민들의 봉기를 막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요청해서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나마 근대화를 위한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이 지식인들과 백성들의 눈에는 단지 왕실을 위한 작업으로 비추었다. 이 때문에 근대적 지식인들에게 조선 정부와 청은 근대화를 가로막는 구 세력, 일본은 새로운 개혁을 위한 모델이었다.

일본을 모델로 삼은 개화파 지식인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의 청년들에게도 당시 일본은 이상적인 국가였다. 이들은 동아시아와는 너무나 다른 유럽보다는 일본을 모델로 해서 근대적인 개혁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옥균의 생각은 루쉰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근대적 지식인들이 일본의 근대화가 민주주의적 개혁의 길이 아닌 군국주의의 길이라는 점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상적 근대화의 길이 아니었다. 결국 이들 중 일부는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겨 은사금을 받고 일본 군국주의를 위해 청년들을 동원하고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길을 걸었다. 일본 제국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구한말의 역사는 하나의 원인에만 책임을 돌리기에는 너무나 복잡했다. 수백 년 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근대화에 실패한 청과 조선이 몰락했고, 군국주의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건만, 그 누구도 변화의 성격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조선 정부뿐만 아니라 개혁파들도 청·일, 러·일전쟁으로 재미를 본 일본의 군국주의 열차가 폭주하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패망에 이르는 과정을 읽지 못하고 미국과 영국을 귀축이라고 비판했다.

정치적 선동 가능성 경계해야

이렇게 난해하게 얽혀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해 역사학계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진행했었다. 여기에는 당시 조선 정부와 개화파 지식인에 대한 평가가 그 핵심에 있었다.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청의 몰락은 논란이 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조선 식민지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는가.

해답은 하나에 있지 않다. 다양한 요인 중 어느 하나를 더 강조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요인들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얽혀 있으면서 상호 간에 원인과 결과를 제공했다. 그렇기에 역사인식의 정치화는 너무나 위험하다. 정치적 목적으로 단 하나의 요인만을 강조함으로써 정치적 선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파시즘과 군국주의하에서 이루어졌던 방식이다.

성찰해야 할 역사적 이슈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이슈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학계의 논쟁이 살아나야 한다. 연구와 논쟁은 근거조차 제대로 제시하지 않는 사이트가 시민의 역사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학계와 시민사회의 거리를 좁힐 때 더 이상 역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을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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