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outlook] 반찬가게 사장·킬러·불륜녀…그녀의 정체는 ‘일타배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진 tvN]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진 tvN]

tvN 드라마 ‘일타 스캔들’은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고 반찬가게 앞치마를 두른 여자 남행선(전도연)과 입시계의 일등 스타 강사 최치열(정경호) 사이의 로맨스를 담은 드라마다. 10회 만에 시청률 13.5%를 훌쩍 넘긴 이 드라마를 보며 누군가는 전도연의 새로운 발견이라 놀라지만, 국가대표 반찬가게 사장 남행선은 이 배우가 필모그래피를 통해 방문해 온 여러 멀티버스 속 전도연들과 속속들이 연결되어 있다. 각자 다른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는 이들이다.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 시네마서비스]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 시네마서비스]

“나는 늘… 사랑을 했던 것 같아요.”

나른한 햇살이 쏟아지는 2004년 봄, 나와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은 서른둘의 전도연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1997년 스크린 데뷔작 ‘접속’부터 영화 ‘약속’ ‘내 마음의 풍금’ ‘해피엔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피도 눈물도 없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인어공주’까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멜로·스릴러·드라마·액션 등 다양한 장르와 시간을 오갔지만 “상황과 인물이 다를 뿐” 그 중심은 모두 사랑이었다고 말이다.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진 일신창업투자]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진 일신창업투자]

이 배우를 움직이는 동력 역시 사랑이다. 직설적이고 간결한 말투의 전도연은 만나자마자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 달변가는 아니다. 대신 신뢰를 쌓고 사랑을 확인한 후엔 그 누구보다 성실한 답변을 안겨준다. 카메라 앞에서도 처음부터 모델 같은 포즈를 척척 취하지 않는다.

“너무 멋져! 너무 예뻐!” 같은 칭찬과 추임새에 “어우 야~” 특유의 콧소리를 섞어가며 부끄러워하면서도,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에너지 드링크처럼 꿀꺽꿀꺽 받아마시며 자신의 에너지를 고조시킨다. 사랑받을 때 투명하게 행복해하는 스타, 남김없이 사랑을 주는 배우, 사랑의 확인을 더없이 즐기는 여자, 전도연은 그런 사람이다.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진 명필름]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진 명필름]

“새로 나왔어요.”

1990년, 베이비 로션 광고 속 18살의 전도연은 그야말로 새로 나온 얼굴이었다. 희고 말간 피부, 여백이 많은 이목구비는 언제라도 얹어질 변화의 메이크업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2004년 출간된 배우론 『우리 시대 한국배우』에서 나는 전도연에 대해 “어떤 반찬을 올려도 기막히게 어울릴 하얀 쌀밥 같은 얼굴”이라고 썼다.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진 CJ ENM]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진 CJ ENM]

1999년 12월, 종로 허리우드 극장에서 영화 ‘해피엔드’의 언론 시사회가 열렸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예열도 없이 격정적인 정사신이 시작됐다. 4분 가까이 벌거벗은 젊은 육체의 팔과 다리가 포개졌던 자리에 중고 책들이 쌓이고 마침내 책방 주인(주현)이 등장하고 나서야 여기저기서 기자들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20년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한낮의 밀회를 즐기는 이 여성의 충만한 환희, 그날 극장의 공기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욕망과 권태가 뒤섞인 그 표정은 ‘접속’의 담백한 짝사랑, ‘약속’의 절절한 멜로, 그리고 ‘내 마음의 풍금’의 동화 같은 첫사랑을 보여주었던 배우에게서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진 넷플릭스]

배우 전도연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일타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사진 넷플릭스]

매번이 거의 ‘스캔들’에 가까운 선택의 연속이었다. 열일곱 늦깎이 초등학생(‘내 마음의 풍금’)에서 불륜에 빠진 유부녀(‘해피엔드’)로, 정절을 목숨처럼 여기는 열녀(‘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집주인을 유혹하는 하녀(‘하녀’)로, ‘사랑밖에 난 몰라’를 외치는 다방 아가씨(‘너는 내 운명’)에서 능수능란한 사기꾼(‘카운트다운’)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지푸라기도 맛있게 요리할 것 같은 솜씨 좋은 이웃(‘일타 스캔들’)으로 말이다.

2013년 겨울,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의 개봉을 맞이해 ‘전도연 특별전’이 열렸다.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 도착한 전도연은 오히려 ‘집에서 나오는 길’처럼 보였다. 화장기 없는 전도연의 민낯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신 매일의 단련으로 만들어낸 탄탄하고 건강한 그 몸이야말로 일회적 메이크업보다 관객을 만나기 위한 더 성실한 준비처럼 보였다.

‘일타 스캔들’ 방영이 시작된 후 전도연의 청바지 핏과 탄탄한 육체에 대한 찬사가 들려온다.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 출신이라는 캐릭터 설정도 있지만, 딸의 학원 수강과 수업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질주하는 남행선의 안정적인 자세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주법으로 보이지 않았다. 영화 ‘무뢰한’의 카메라는 유독 김혜경(전도연)의 걷는 모습을 자주 잡아낸다. 세상의 위협이 더 해질수록 전도연의 페르소나들은 더욱 딴딴하게 걷는다. 더 맹렬하게 달린다.

오늘 개막 베를린영화제 초청받아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물론 여성 배우에게 나이는 여전히 두려운 산이다. 하지만 ‘바람난 가족’에서 ‘미나리’로 이어지는 윤여정의 놀라운 확장성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막 50대로 진입한 전도연이 보여준 ‘일타 스캔들’의 성공은 50대 여성배우의 선택지 역시 충분히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16일 개막하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3월 31일 공개)에서 전도연은 마트 문 닫을 시간 전에 임무를 끝내야 하는 생활 밀착형 킬러 복순을 연기한다.

2023년 2월, 전도연은 오늘도 연애 중이다. ‘일타 스캔들’의 남행선은 반찬만 잘 조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맛깔나게 요리한다. 떠나는 남자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여서 보낼래…” 라며 오열하던 ‘약속’의 여자는, 무정한 남자들에게 휙휙 잡채를 비벼내던 ‘무뢰한’의 여자는, 이제는 내 가족과 연인, 동네 주부들의 저녁을 책임지기 위해 계란 지단을 부치고 겉절이를 담근다.

스크린과 TV를 유연하게 오가며 흥행과 시청률을 보장하는 ‘일타’ 배우로, 칸의 여왕이자 동네 이웃으로 유일무이한 존재감을 확보한 배우 전도연.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묻는 팍팍한 세상 속에서 꾸준히 “사랑 밖에 난 몰라”를 외치는 이 배우의 예술은 관객의 끼니가 된다. 이 사랑은 밥 먹여 준다.

백은하

백은하

백은하=1999년 ‘씨네21’ 기자로 시작해 영화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배우론을 담은 책 『우리시대 한국배우』 『넥스트 액터』 『배우 이병헌』 『배우 배두나』 등을 펴냈다.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