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 배우 전도연...그는 여전히 "사랑 밖에 난 몰라"를 외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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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전도연이 반찬가게 앞치마를 두른 로맨스 드라마 '일타 스캔들'이 10회만에 시청률 13.5%를 훌쩍 넘겼다. 사진 tvN

배우 전도연이 반찬가게 앞치마를 두른 로맨스 드라마 '일타 스캔들'이 10회만에 시청률 13.5%를 훌쩍 넘겼다. 사진 tvN

tvN 드라마 ‘일타 스캔들’은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고 반찬가게 앞치마를 두른 여자 남행선(전도연)과 입시계의 일등 스타 강사 최치열(정경호) 사이의 로맨스를 담은 드라마다.
10회 만에 시청률 13.5%를 훌쩍 넘긴 이 드라마를 보며 누군가는 전도연의 새로운 발견이라 놀라지만, 국가대표 반찬가게 사장 남행선은 이 배우가 필모그래피를 통해 방문해 온 여러 멀티버스 속 전도연들과 속속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저 이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프라이팬을 돌릴 뿐이다. 이들은 각자 다른 세상의 중심에서 동시에 ‘사랑’을 외친다.
국가 대표 배우이자 일등 스타 그리고 반전의 로맨스까지, ‘일타 스캔들’은 한 편의 드라마가 한 배우의 삶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경쾌한 증거다.

전도연 한석규 주연의 영화 '접속'. 사진 명필름

전도연 한석규 주연의 영화 '접속'. 사진 명필름

“나는 늘… 사랑을 했던 것 같아요.”
나른한 햇살이 쏟아지는 2004년 봄, 나와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은 서른둘의 전도연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1997년 스크린 데뷔작 ‘접속’부터 영화 ‘약속’ ‘내 마음의 풍금’ ‘해피엔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피도 눈물도 없이’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인어공주’까지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멜로, 스릴러, 드라마, 액션, 현대와 과거까지 다양한 장르와 시간을 오갔지만 “상황과 인물이 다를 뿐” 그 중심은 모두 사랑이었다고 말이다.
이 배우를 움직이는 동력 역시 사랑이다. 직설적이고 간결한 말투의 전도연은 만나자마자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 달변가는 아니다. 대신 신뢰를 쌓고 사랑을 확인한 후엔 그 누구보다 성실한 답변을 안겨준다. 카메라 앞에서도 처음부터 모델 같은 포즈를 척척 취하지 않는다.
“너무 멋져! 너무 예뻐!” 같은 칭찬과 추임새에 “어우 야~” 특유의 콧소리를 섞어가며 부끄러워하면서도,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에너지 드링크처럼 꿀꺽꿀꺽 받아마시며 자신의 에너지를 고조시킨다. 사랑받을 때 투명하게 행복해하는 스타, 남김없이 사랑을 주는 배우, 사랑의 확인을 더없이 즐기는 여자, 전도연은 그런 사람이다.

새로 나온 얼굴의 반란  

“새로 나왔어요.”
1990년, 베이비 로션 광고 속 18살의 전도연은 그야말로 새로 나온 얼굴이었다. ‘칸의 여왕’ ‘국가대표’ 같은 선명하고 무거운 이미지보다는, ‘접속’의 PC통신 아이디 ‘여인 2’처럼 희고 말간 피부, 여백이 많은 이목구비는 언제라도 얹어질 변화의 메이크업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2004년 출간된 배우론 『우리 시대 한국배우』에서 나는 전도연에 대해 “어떤 반찬을 올려도 기막히게 어울릴 하얀 쌀밥 같은 얼굴”이라고 썼다.

탤런트 겸 영화배우 전도연. 2004년 모습이다. 중앙포토

탤런트 겸 영화배우 전도연. 2004년 모습이다. 중앙포토

1999년 12월, 종로 허리우드 극장에서 영화 ‘해피엔드’의 언론 시사회가 열렸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예열도 없이 격정적인 정사신이 시작됐다. 4분 가까이 벌거벗은 젊은 육체의 팔과 다리가 포개졌던 자리에 중고 책들이 쌓이고 마침내 책방 주인(주현)이 등장하고 나서야 여기저기서 기자들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20년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한낮의 밀회를 즐기는 이 여성의 충만한 환희, 그날 극장의 공기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욕망과 권태가 뒤섞인 그 표정은 ‘접속’의 담백한 짝사랑, ‘약속’의 절절한 멜로 그리고 ‘내 마음의 풍금’의 동화 같은 첫사랑을 보여주었던 배우에게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매번이 거의 ‘스캔들’에 가까운 선택의 연속이었다. 열일곱 늦깎이 초등학생(영화 ‘내 마음의 풍금’)에서 불륜에 빠진 유부녀로(‘해피엔드’), 정절을 목숨처럼 여기는 열녀(‘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집주인을 유혹하는 하녀로('하녀'), ‘사랑밖에 난 몰라’를 외치는 다방 아가씨(‘너는 내 운명’)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능수능란한 사기꾼으로(‘카운트다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에서 지푸라기도 맛있게 요리할 것 같은 솜씨 좋은 이웃(‘일타 스캔들’)으로 말이다.

영화 '해피엔드' 최민식과 전도연.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해피엔드' 최민식과 전도연. 사진 CJ엔터테인먼트

황정민과 호흡 맞춘 영화 '너는 내 운명'(2005)에서 전도연. 사진 CJ엔터테인먼트

황정민과 호흡 맞춘 영화 '너는 내 운명'(2005)에서 전도연. 사진 CJ엔터테인먼트

2013년 겨울,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의 개봉을 맞이해 ‘전도연 특별전’이 열렸다.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 도착한 전도연은 오히려 ‘집에서 나오는 길’처럼 보였다. 여성의 ‘꾸밈 노동’이 기본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화장기 없는 전도연의 민낯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신 매일의 단련으로 만들어낸 탄탄하고 건강한 그 몸이야말로 일회적 메이크업 보다 관객을 만나기 위한 더 성실한 준비처럼 보였다.
‘일타 스캔들’ 방영이 시작된 후 전도연의 청바지 핏과 탄탄한 육체에 대한 찬사가 들려온다. 국가대표 핸드볼 선수 출신이라는 캐릭터 설정도 있지만, 딸의 학원 수강과 수업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질주하는 남행선의 안정적인 자세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주법으로 보이지 않았다. 영화 ‘무뢰한’의 카메라는 유독 김혜경(전도연)의 걷는 모습을 자주 잡아낸다. 세상의 위협이 더 해질수록 전도연의 페르소나들은 더욱 딴딴하게 걷는다. 더 맹렬하게 달린다.

지천명의 전도연  

2019년 여름, 전도연은 막 10대로 접어든 딸과 함께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찾았다. 조용히 곁을 지키는 아이에게서 엄마의 직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존경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어지는 개막식 뒤풀이에서 전도연은 원로 영화인들과 젊은 영화인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전도연 선배’는 어제의 충무로와 오늘의 한국 영화, 그리고 어디에선가의 미래를 함께 할 동료들의 손을 느슨한 듯 단단히 잡고 있는 듯 보였다. 영화 ‘불한당’의 설경구로부터 촉발된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수식은 ‘뉴 피프티’ 남성 배우들의 출현을 알리는 반가운 신호탄이었다.

2007년 5월 영화 '밀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 폐막식 리셉션장에서의 전도연과 장만옥(가운데). 사진 김동호

2007년 5월 영화 '밀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 폐막식 리셉션장에서의 전도연과 장만옥(가운데). 사진 김동호

물론 여성 배우에게 나이는 여전히 두려운 산이다. 하지만 ‘바람난 가족’에서 ‘미나리’로 이어지는 윤여정의 놀라운 확장성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막 50대로 진입한 전도연이 보여준 ‘일타 스캔들’의 성공은 50대 여성배우의 선택지 역시 충분히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구경이’에 이어 '마에스트라'를 준비 중인 이영애, ‘너를 닮은 사람’에서 ‘마스크 걸’로 이어지는 고현정 등 90년대 TV드라마에서 발굴되고, 영화를 통해 성장하고, OTT 시리즈의 믿음직한 얼굴로 자리 잡은 50대 여성 배우들의 선택지는 분명 과거와 달라질 것이다.
16일 개막하는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3월 31일 공개)에서 전도연은 마트 문 닫을 시간 전에 임무를 끝내야 하는 생활 밀착형 킬러 복순을 연기한다.

일타 배우가 차려주는 국가대표 밥상  

2023년 2월, 전도연은 오늘도 연애 중이다. ‘일타 스캔들’의 남행선은 반찬만 잘 조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맛깔나게 요리한다. 떠나는 남자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여서 보낼래…” 라며 오열하던 ‘약속’의 여자는, 무정한 남자들에게 휙휙 잡채를 비벼내던 ‘무뢰한’의 여자는, 이제는 내 가족과 연인, 동네 주부들의 저녁을 책임지기 위해 계란 지단을 부치고 겉절이를 담근다.
스크린과 TV를 유연하게 오가는 직업인으로, 흥행과 시청률을 보장하는 '일타' 배우로, 칸의 여왕이자 동네 이웃으로 유일무이한 존재감을 확보한 배우 전도연.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묻는 팍팍한 세상 속에서 꾸준히 "사랑 밖에 난 몰라"를 외치는 이 배우의 예술은 관객의 끼니가 된다. 이 사랑은 밥 먹여 준다.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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