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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수인의 교육벤처

디지털 교육, 왜 장애접근성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이수인 에누마 대표

이수인 에누마 대표

요즘 시력이 나빠져서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 눈이 침침하고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글자 크기를 키워야 했다. 화면도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나오게 해주는 ‘다크 모드’로 바꿨다.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보다가 눈이 피곤해지면 눈을 감고 ‘음성 읽기’ 버튼을 눌러서 소리로 듣는다. 눈을 감고 책이나 신문 콘텐트를 듣다가 “지금 몇시야?”라고 AI 비서에게 묻기도 한다.

몇 년 전까지도 종이책을 사랑했던 내가, 책의 배경색이 바뀌고 글자가 커지고 눈을 감으면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이 없으면 불편해하리라고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현재 잘 쓰고 있는 방법이 있으면 굳이 디지털로 전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니 미리 판단해서 비판하기 쉽다. 기술이 불러올 미래의 편리함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애가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라고 한다. “읽는 것이 어려운 사람에게 새로운 기술이 뭘 해줄 수 있을까?”

글자확대·읽어주기, 명암반전 등
디지틸 기기의 장애접근성 기능
많은 사람들에게 편리함 가져와
여러 수준의 학생들 고루 살펴야

지난 ‘CES 2023’에서 장애접근성 부문에서 최고 혁신상을 받은 벤처기업 ‘닷’의 촉각 그래픽 장치 ‘닷 패드’. 시각장애인도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그림을 손가락으로 인식할 수 있다. [사진 닷]

지난 ‘CES 2023’에서 장애접근성 부문에서 최고 혁신상을 받은 벤처기업 ‘닷’의 촉각 그래픽 장치 ‘닷 패드’. 시각장애인도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그림을 손가락으로 인식할 수 있다. [사진 닷]

2009년 아이폰이 나온 지 얼마 뒤 미국에서 ‘모든 아이의 가방에 킨들을’이라는 법안이 추진되었다. 아직 태블릿 PC가 나오지 않은 때였다. 킨들은 아마존의 전자책 리더기였는데, 이를 모든 아이에게 나눠줘서 가방 무게를 줄이고 인터넷으로 도서관에 접속해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게 하려는 취지였다. 이 법안은 결국 무산됐다. 시각장애 담당 교사들이 킨들에 시각장애 학생을 배려한 기능이 없다는 점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11조원이 투입될 이 법안이 좌초한 이유가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학교에 대규모로 기술을 도입할 때에는 장애접근성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라는 특수 교육계의 메시지는 교육정책 담당자들과 IT 대기업들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그다음 해에 아이패드가 나왔을 때 제조사 애플 측은 장애접근성을 큰 장점으로 내세웠다. 당시로는 실험적인 단계이었던 화면 글자를 읽어주는 음성합성기능(TTS), 글자 읽는 속도를 조절하는 기능, 특정 부분을 확대하는 기능, 화면의 명암 반전 등, 요즘 내가 매일 사용하고 있는 기능들의 초기 버전을 구현하였다.

이런 수준의 장애접근성은 비슷한 시기에 추진된 디지털 교육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는 장애학생들의 보편교육을 보장하는 장애인학습법이 있다. 학교 안에서의 이동, 운동장이나 화장실의 설계 등에서 장애접근성의 기준이 매우 높다. 디지털 제품을 선택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기준이 적용된다. 장애접근성 지원 여부와 다양한 학습자를 위한 보편적 학습설계가 적용되었는지를 자세히 살핀다.

파급 효과는 작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장애학생을 위해 도입된 기술이 일반 학생들의 학습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일례로 학습 소프트웨어에서 시각장애인용 기능이던 음성합성 시스템을 어린아이들과 난독증을 가진 아이들이 가장 많이 쓰게 되었다. 동영상 자막의 수혜자도 청각장애인뿐 아니라 이주배경 아동이나 주의집중장애 아이들로 넓어졌다. 난독증 아이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하이라이트 기능은 읽기를 처음 배우는 모든 아이에게 매우 유용하다. 디지털로 학습을 구성할 때에 다양한 능력과 인지 성향을 가진 학습자들을 배려하는 보편적 학습 설계의 개념도 계속 발전하게 되었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뿐 아니라 다양한 성향과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쉽게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국의 디지털 교육도 이제 본격화하고 있다. ‘기존 방식으로 하지 못하던 것을 새로운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을지가 궁금하다. 디지털 교육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교실내 장애접근성 향상과 다양한 수준의 학생을 위한 개별화 교육이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정책결정자와 교육자, 그리고 제품을 제작하는 기업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명확한 정책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하고, 교사들이 엄격하게 평가해야 하고, 디지털 교육 제품 개발사들에도 이에 상응하는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그 효과는 다각적이다. 다양한 학습자를 지원함으로써 기존 교실의 획일성을 보완하고, 디지털 교육 전환의 장점을 확인하고, 한국 제품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술은 사람을 향합니다’라는 유명한 문구처럼 기술은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목표로 한다. 학교에 도입될 디지털 기술이 모든 학생에게 충분히 좋은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단지 아이들의 학교, 장애 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교육, 나아가서 사회 전체의 미래를 보다 편리하고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수인 에누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