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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노인에게 ‘노노상속’ 급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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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손해용 기자 중앙일보 경제부장
손해용 경제부장

손해용 경제부장

고령화로 나타난 또 하나의 문제는 ‘노노(老老)상속’이다. 80·90대 노부모가 사망한 뒤 노인이 된 자녀가 재산을 물려받는 것을 뜻한다. 고령층 안에서 자산이 머물며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는 부작용을 일으킨다.

14일 국세청에 따르면 2021년 상속세 과세대상 재산을 물려준 사망자(피상속인) 가운데 나이가 80세가 넘은 사람은 6427명이었다. 불과 2년 새 68% 늘었다.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07년(940명)과 비교하면 7배가량으로 불었다. 국세청이 집계한 상속재산가액으로 계산하면 13조1356억원에 달한다. 전체 피상속인에서 8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도 2007년 36.1%에서 2021년 50.4%로 증가했다. 상속 재산이 적어 상속세를 내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노노상속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80세를 넘은 피상속인의 자녀는 50~60대가 대부분이다.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시기다. 이들은 소비지출 성향이 낮다. 청년·중년 때처럼 소비·투자하기보다는, 노후를 걱정해 안전한 곳에 돈을 묻어둔다. 이른바 ‘자산 잠김’이 심화한다는 의미다. 노인이 사망한 뒤 재산이 젊은층이 아닌, 노인층에게 넘어가면서 국가 전체적으로 투자 및 자금운용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한국보다 먼저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에선 20여년 전에 노노상속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일본의 80세 이상 피상속인 비중은 1989년 38.9%에서 1998년 46.5%로 오르더니, 2018년에는 71.1%까지 올라갔다. ‘잃어버린 20년’의 원인을 노노상속에서 찾기도 한다. 돈이 경제 활동이 왕성한 세대로 넘어가지 않다보니, 경제에 활력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은 노노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세대를 건너뛴 조손(祖孫) 간 증여에 세금을 깎아주는 정책을 폈다. 2013년 교육 자금에 증여세 비과세를 적용한 데 이어 2015년에는 주택취득자금, 육아·결혼·출산 비용까지 혜택을 확대했다. 고령층에 편중된 자산을 젊은층으로 이전시켜 상속이 내수 소비로 이어지게 하고, 세대 간 부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의 사례를 참고해 한국도 선제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때마침 정부는 선진국 가운데 최고 수준인 현행 상속·증여세에 대한 개편작업을 진행 중이다. 상속세를 전체 유산이 아니라 물려받는 재산에 대해서만 세금을 내는 ‘유산취득세’로 개편하고, 9년째 그대로인 증여세 면세 기준(5000만원)을 올리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세대 간 자산 이동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라는데, 노노상속의 해법도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