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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렬의 세계경제전망

'집행관'은 가지만, 아베노믹스 일단은 유지할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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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아베노믹스의 운명은

이상렬 논설위원

이상렬 논설위원

세계 3위 경제 대국 일본의 통화정책을 이끌 새로운 사령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은행(BOJ) 새 총재로 지명된 71세의 도쿄대 명예교수 우에다 가즈오(植田和男)다. 일본 정치 지형에 비춰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선택한 우에다의 의회 비준은 무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써 오는 4월 8일 퇴임하는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79) BOJ 총재의 10년 천하는 막을 내리게 된다.

우에다 신임 총재에 대한 글로벌 이코노미스트들의 관심은 결국 하나다. ‘아베노믹스’의 상징이었던 대규모 금융완화가 지속할 것인가 여부다. 구로다는 명실공히 아베노믹스의 집행관이었다. 2013년 BOJ 총재 취임 이래 집요하게 무제한 금융완화를 밀어붙였다. “일본은행 윤전기를 쌩쌩 돌려 돈을 찍어내겠다”는 아베 신조( 安倍晋三) 총리(2006~2007년·2012~2020년 재임, 22년 7월 사망)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했다. 수익률곡선통제(YCC)정책, 마이너스 금리 등 세계 경제사에 기록될 ‘초완화 정책’이 그의 지휘 아래 도입됐다.

양적완화 주역 구로다 총재 퇴임
일본은행 새 총재에 우에다 가즈오

일단 "금융 완화 계속” 밝혔지만
'무제한 통화공급' 출구 모색할듯

장기금리 변동 폭부터 확대하되
단기금리는 내년 이후 검토 전망

이상렬의 세계경제전망

이상렬의 세계경제전망

애초 아베노믹스는 세 개의 화살을 쏘아 올렸다. 재정확대를 통한 경기부양과 구조개혁, 그리고 무제한 양적 완화였다. 그러나 재정확대와 구조개혁, 두 개의 화살은 이내 부러졌다. 구로다가 맡은 금융완화만 살아남았고, 그것이 아베노믹스의 상징이자 동의어처럼 됐다. 아베노믹스는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 늪으로 더 깊숙이 빠져들지 않게 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디플레에서 제대로 건져내지도 못했다. 무제한 통화 주입으로 시장은 왜곡됐다. 공(功)도 있고, 과(過)도 있다. 세계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제로금리를 토대로 엔 캐리(Yen Carry) 자금이 세계를 누볐다. BOJ의 양적·질적 완화 정책은 코로나19에 짓눌린 각국 중앙은행가들의 연구 모델이기도 했다.

우에다의 일성 “현 통화정책 적절”
지금으로선 BOJ의 현 금융완화 정책이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선 정치적인 사정이 있다. 기시다 총리는 여당인 자민당 다수파인 아베파의 견제를 받고 있다. 아베의 정치적 유산인 아베노믹스를 섣불리 폐기할 수 없는 처지다. 그럼에도 기시다는 아베의 유산과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 “일본이 지난 30년간 원하는 낙수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기시다의 평가 속에 속내가 담겼다.

총재 지명 이후 현 통화정책에 대한 우에다의 일성은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통화정책은 현 상황과 향후 경제와 물가에 대한 예측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면서다. “현 상황을 고려하면 통화완화는 계속돼야 한다”라고도 했다. 이는 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한 계산된 발언으로 봐야 한다. 기시다가 아베가 아니듯 우에다도 구로다와 다른 인물이다. 구로다처럼 아베노믹스에 속박돼 있지도 않다. 작년 7월 우에다의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신문 기고에 힌트가 있다. 그는 성급한 금리 인상을 경고하면서도 “어느 시점엔가 (BOJ의) 전례 없는 금융완화 정책을 재검토하고 출구전략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그의 지향점이다.

대규모 금융완화가 부른 딜레마
우에다가 당장 초완화 금융정책에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것은 일본 경제와 BOJ의 딜레마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BOJ는 일본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는 방식으로 시장에 돈을 풀어왔다. 그 결과 일본 국채의 50% 이상을 BOJ가 보유하는 기형적 상태가 됐다. 국가채무는 부풀어 올라 지난해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대비 263.9%를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단연 1위다.

자료:교도통신, 도쿄 외환시장, 미국 재무부, 대신증권, 블룸버그, 닛케이

자료:교도통신, 도쿄 외환시장, 미국 재무부, 대신증권, 블룸버그, 닛케이

양적 완화 종료로 금리가 오르는 순간 재정의 이자 부담은 급증하게 되고, 국채 가격 하락이 국채 투매를 촉발할 수 있다. 이에 따른 시중 금리 인상과 소비ㆍ투자 부진은 경기에 독(毒)이다. 디플레이션 늪으로의 복귀는 일본 국민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다.

‘엔저’로 소비자물가 41년 만에 최고

그렇다고 현 금융완화를 계속 끌고 가는 것도 한계에 왔다. 세계 각국이 금리 인상으로 코로나19 시기에 낀 거품을 빼고 있는데, 일본만 나 홀로 ‘제로 금리’를 고수하면서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엔저’로 수입 가격이 뛰면서 물가 압박이 극심해졌다. 지난해 12월 소비자물가(신선식품 제외)는 4.0% 뛰어올랐다. 1981년 이후 41년 만에 최고치다. 아베노믹스 목표가 정체된 물가를 2%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외형은 초과 달성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지금의 인플레는 아베노믹스가 의도한 소비와 투자 확대의 결과가 아니라 엔화 약세 탓이 크다. 일본과 해외의 금리 격차에 따른 자금 이탈이 초래한 ‘나쁜 엔저’가 ‘나쁜 인플레’를 일으키는 것이다. 구로다가 바랬던 임금 상승은 여전히 전개되지 않고 있다. 외려 실질 임금은 8개월 연속 하락했다. 일본 재계 단체인 게이단렌이 회원 기업들에 임금을 올려주라고 촉구하고 있지만 먹혀들지 않고 있다. YCC를 통한 장기 금리 억제가 가져온 시장 왜곡도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우에다는 ‘일본의 벤 버냉키’
얽히고설킨 딜레마를 우에다가 풀 수 있을까. 우에다의 개인 역량은 흠잡을 게 없어 보인다. 그는 일본 양적 완화 정책 최고수 중 한 명이다. 1998년~2005년 BOJ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정책위원회 심의위원(한국의 금융통화위원)을 지내면서 제로 금리와 양적 완화 도입에 참여했다. 현재 BOJ의 싱크탱크인 통화경제연구소의 수석 고문을 맡고 있어 최근 금융완화 정책도 꿰뚫고 있다.
학문적 백그라운드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세계의 중앙은행을 주름잡고 있는 ‘스탠리 피셔 사단’의 일원이다. 피셔는 MIT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한 뒤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 연방준비제도(Fed) 부의장을 지냈다. 우에다의 MIT 박사 과정 지도교수가 피셔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Fed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 유럽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마리오 드라기,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도 피셔의 제자였다. 달러 살포로 미국을 금융위기에서 구한 ‘헬리콥터 벤’(버냉키)과 적극적 통화정책으로 유로존 위기에서 유럽을 구한 ‘슈퍼 마리오’(마리오)가 우에다와 비슷한 시기 피셔 밑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서머스는 블룸버그 TV에 나와 “우리는 그를 일본의 벤 버냉키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중앙은행가들과의 친밀한 관계는 향후 BOJ 정책에 대한 국제 사회의 신뢰와 지지를 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엔화가치 급변 이벤트는 없을 듯 
시장 전문가들은 우에다의 첫 번째 수술 대상으로 수익률곡선통제(YCC)정책을 꼽는다. 10년물 장기 국채 금리를 0%에 묶어두되 상하 0.5%의 변동만 허용하는 제도다. 여기엔 BOJ의 국채 과다 보유, 일본 정부의 재정 부실, 채권 가격 기능 상실 등 대가가 따른다. 게다가 장기금리 고정은 미국과의 금리 격차를 키우며 엔화가치 폭락 등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서머스 전 장관은 “수익률 통제를 무한정 지속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보다 유연한 수익률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 관건은 YCC 수술 방향과 시점이다. 과격한 수술은 엄청난 후폭풍을 야기한다. 작년 12월 변동폭 확대(상하 0.25%→0.5%)만 해도 곧바로 장기금리 상승을 불렀다.
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일단 YCC 효과와 부작용을 검토한 뒤 장기 금리 변동 폭을 조금씩 신중하게 확대해 나갈 가능성이 있다”면서 “단기 금리 인상은 내년 이후에나 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우에다의 등장과 구로다의 퇴장은 아베노믹스의 폐막을 기정사실로 한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다. 현 금융완화 프레임은 당분간 드라마틱한 변화 없이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단기적으로 엔화 가치의 급변 가능성은 작다고 볼 수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일본 금융시장의 정상화는 한국 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지금으로선 엔 캐리 자금의 급격한 환류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에 드리운 일본 경제의 그림자

일본 경제가 재채기를 하면 한국 경제가 감기에 걸린다는 말이 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대표적 사례다. 그해 외국 단기자금 375억 달러가 빠져나간 것이 위기의 도화선이었다. 일본은 한국에 빌려준 단기자금 218억 달러 중 60%인 130억 달러를 회수해갔다. 그것이 원화 가치 폭락의 최대 요인이었다(강만수, 『현장에서 본 경제위기 대응실록』). 2013년 본격화한 아베노믹스는 막 출범한 박근혜 정부의 경제운용에 큰 부담을 안겼다. 엔화 가치가 속락하면서 한국 수출 전선이 위협받았다. 당시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가 아베노믹스의 무제한 통화 방출을 ‘이웃 나라 거지 만드는 정책’이라고 비판했지만, 미국의 비호 아래 문제없이 넘어갔다. 지난해에도 한국 수출기업들은 엔화 폭락에 속을 끓였다. 달러당 엔화가치는 150엔선을 뚫고 내려가기도 했다. 과거엔 엔화 대비 원화가치가 ‘1대10’보다 오르면 한국경제가 우환을 겪곤 했다. 외환위기 직전 인 1996년 100엔당 원화가치는 727원,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엔 829원이었다. 13일 원·엔 환율은 100엔당 962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