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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집 피해 한국행 러 청년…넉달 '공항노숙' 벗어날 길 열렸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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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이(왼쪽)과 쟈샤르는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3층 46번 게이트 부근에서 살고 있는 ‘공항 난민’ 이다. 지난해 12월 22일 안드레이와 쟈샤르가 창밖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항공기를 바라보고 있다. 왕준열 PD

안드레이(왼쪽)과 쟈샤르는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3층 46번 게이트 부근에서 살고 있는 ‘공항 난민’ 이다. 지난해 12월 22일 안드레이와 쟈샤르가 창밖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항공기를 바라보고 있다. 왕준열 PD

“정말 추방 안 당하는 거예요? 이긴 게 맞아요? 이제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있어요?”
14일 오전 수화기 너머 안드레이(가명·30대)의 목소리가 떨렸다. 법률대리인을 통해 이날 법무부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이하 공항출입국청)을 상대로 한 행정소송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난해 10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징집령을 피해 한국에 온 그는 131일째 인천공항 제1여객터미널 3층 46번 게이트에서 숙식을 해결해왔지만 이날 판결로 공항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4일 인천지법 행정1단독 이은신 판사는 안드레이가 공항출입국청장을 상대로 낸 난민인정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판결했다. 안드레이가 난민인정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 판사는 안드레이의 난민인정신청이 ‘명백히 이유 없는 경우’라고 할 수 없고 난민인정심사를 통한 구체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 판사는 안드레이가 주장한 ▶35세 이하의 군 경력자로서 부분 동원령에 의한 징집대상임이 분명하고▶실제 징집담당관이 징집소환장에 안드레이의 서명을 받으러 2번이나 집으로 찾아왔으며▶2번에 걸쳐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고 특수부대 요원에게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는 등의 내용을 사실로 인정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전쟁의 성격 등에 비추어볼 때 안드레이의 징집거부가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거나 이로 인해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판사는 안드레이와 함께 행정소송을 낸 러시아인 A에 대해서도 같은 결정을 했지만 또다른 러시아인 B의 청구는 기각했다.

안드레이는 지난 9월 21일 입대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사진 안드레이

안드레이는 지난 9월 21일 입대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사진 안드레이

 출입국당국이 항소하지 않거나 항소하더라도 조건부로 입국을 허가할 경우 안드레이는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법무부 관계자는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 여부와 입국허가 여부 등을 결정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안드레이는 “시차가 있어서 고국의 가족들하곤 통화하지 못했다”며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공항 밖으로 나가는 게 우선이라 다른 계획은 없다. 차근차근 생각해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법무부는 난민법 제45조에 따라 인천 중구에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난민신청자 등에 숙식을 제공하고 의료지원 등을 도맡는다. 안드레이의 소송을 도운 이종찬 변호사는 “출입국·외국인 지원센터를 비롯해 안드레이가 머무를 곳 등을 법무부와 협의해 알아보고 있다. 한국 정착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드레이는 나발니를 지지하는 시위에 참석한 후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당시 구타를 당했고 코를 다쳤다고 한다. 사진 안드레이

안드레이는 나발니를 지지하는 시위에 참석한 후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당시 구타를 당했고 코를 다쳤다고 한다. 사진 안드레이

 안드레이는 지난해 10월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을 떠나 카자흐스탄을 거쳐 한국에 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해왔던 그는 지난해 9월 징집소환장을 받자 “블랙리스트라 끌려가면 무조건 최전선에 간다”는 생각에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K-ETA(한국 전자여행 허가)가 있었고 고려인 친구 등 인연이 있어 한국행을 택했다. 그는 지난해 초 푸틴 대통령의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를 지지하는 시위에 참여한 뒤 경찰에 협박과 함께 구타를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법무부 출입국당국은 안드레이가 ‘경제적인 이유로 난민 인정을 받으려는 등 난민 인정 신청이 명백히 이유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봤었다. 난민인권네트워크 등은 “법무부는 살상을 거부한 이들에게 난민심사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인천국제공항 출국대기실에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기도 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후 지난해 3월~11월 국내에서 난민신청을 한 러시아인은 891명이다. 2021년(45명)에 비해 많이 늘어난 숫자다. 러시아인 난민신청이 급증하지만, 아직 국내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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