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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탕은 누가 한턱 낼때만"...만원으론 점심도 못먹는 직장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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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월급의 거의 반이 밥값으로 나가는 것 같아요.”
13일 점심 무렵 북창동 음식 거리에서 만난 사회 초년생 정 모 씨는 얼마전부터 가능하면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고 했다. 줄줄이 오르는 회사 인근 식당의 점심 메뉴 가격이 부담스러워서다. 미처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한 날에는 김밥 같은 간단한 메뉴로 한 끼를 때운다. 정씨는 “샌드위치나 김밥 정도를 빼면 요즘 이 근처에서 만 원짜리 한장으로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많지 않다”면서 “예전에는 한 줄에 3500원인 김밥도 너무 비싸다고 느꼈는데 다른 음식값이 너무 오르다 보니 요즘은 김밥 정도면 차라리 괜찮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높은 물가에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려는 직장인이 몰리면서 편의점 매대가 텅비어 있다. 독자제공

높은 물가에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려는 직장인이 몰리면서 편의점 매대가 텅비어 있다. 독자제공

경기도 판교 테크노밸리의 IT업체에 근무하는 이선애(28)씨도 주로 편의점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이씨는 “회사 인근 식당의 돈가스 세트가 1만2000원에서 1만5000원으로 올랐고, 갈비탕 한 그릇도 1만6000원이라 직장 상사나 동료가 '한턱' 낼 때나 먹는 음식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점심을 때우려 편의점을 찾는 직장인들이 워낙 많다 보니 조금 늦게 가면 삼각김밥이나 샌드위치가 다 팔리고 없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점심 평균 식대 만원 넘겨 

득달같이 오르는 외식비에 점심 끼니 해결을 고민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부터 물가가 급등하고 있는 데다 코로나19 상황이 풀리면서 직장으로 출근하는 날이 늘면서 밥값 부담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런치플레이션(점심을 뜻하는 런치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의 합성어)' 현상이다.

13일 푸드테크기업 식신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직장인이 점심시간(오전 11시~오후 2시)에 쓴 평균 식대는 1인당 9633원으로 만원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전(8302원)과 비교하면 16.0% 올랐다. 특히 서울은 1만2285원으로 전년 동기(9180원) 대비 33.8% 급증하면서 만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젊은 직장인이 많은 경기도 판교 지역도 1만1014원으로 만원을 넘겼다. 부산(1만1808원)·대구(9995원)·대전(9508원) 등 다른 지역 역시 만원을 넘겼거나 근접한 수준이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실제로 취재진이 직장인이 점심에 자주 찾는 서울 중구 북창동의 '음식 거리’ 의 주요 식당을 둘러보니 28곳 중 9곳은 가장 싼 점심 메뉴가 만원을 넘겼다. 식당 세 곳 중 한 곳에선 만 원 한 장으론 점심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식당도 대부분 가장 싼 점심 메뉴가 8000원 이상이었다. 인근에서 직장을 다닌다는 김모씨는 “만원은 진작에 뛰어넘었고, 식사 후 커피값까지 더하면 실제 체감하는 부담은 한 끼에 1만5000원에서 1만8000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서울 북창동 음식거리 한 음식점 메뉴판. 서지원 기자

서울 북창동 음식거리 한 음식점 메뉴판. 서지원 기자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점심시간의 여유'를 상징하던 커피 값을 줄이는 직장인도 늘고 있다. 역시 북창동 인근 회사를 다니는 정모씨는 “원래 점심을 먹고 2500원짜리 저가 커피라도 하루 한 잔은 꼭 마셨는데, 요즘은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안 먹거나 회사에 있는 인스턴트 커피를 타 먹는다”고 했다.

아예 사무실을 나가지 않고 도시락을 정기적으로 배달시켜 먹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이른바 '도시락 정기 구독'이다. 직장인 이모씨는
“일단 나가면 돈을 쓰게되니 상대적으로 저렴한 도시락을 매일 배달받아 먹는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비빔밥·냉면 만원 넘겨…김밥·햄버거도 따라 올라

'런치플레이션'은 비빔밥·냉면·김치찌개 등 흔히 찾는 메뉴에서도 도드라진다. 한국소비자원의 가격정보 포털 ‘참가격’에 따르면 올해 1월 서울지역 비빔밥 평균 가격은 지난해 1월(9192원)과 비교해 약 8.7% 오르면서, 1인분에 정확히 만원이 됐다. 역시 서울을 기준으로 지난달 냉면 값(1만692원)도 1년 새 약 9% 오르면서 처음 만원을 뛰어넘었다. 김치찌개 백반(7654원)·칼국수(8615원)·자장면(6569원)값도 크게 올라 부담이 커졌다. 김밥값(3100원)도 서울 1월을 기준으로 지난달 한 줄에 3000원을 처음 넘어섰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나마 저렴했던 프랜차이즈업체 햄버거 가격도 줄줄이 오르고 있다. 맥도날드는 오는 16일부터 주요 메뉴의 판매 가격을 평균 5.4% 올린다고 밝혔다. 지난해 8월 이어 6개월 만에 두 번째 인상한 것이다. 대표 메뉴인 빅맥은 지난해 7월까지만 해도 4600원이었지만 이번 인상으로 5000원 선을 넘어섰다. 롯데리아도 평균 가격을 5.1% 올렸고, ‘가성비’을 내세운 노브랜드 버거도 전체 메뉴 31개 중 23개 평균 가격을 4.8% 인상한다고 밝혔다.

“런치플레이션, 가속화 우려”

문제는 '런치플레이션'이 꺾이기는커녕 갈수록 가팔라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외식 물가는 농·축·수산식품 같은 원재료 가격은 물론 공공요금·임금 같은 다른 물가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가격도 가장 나중에 오르는 특징이 있다. 지난해 말부터 공공요금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터라 재료비, 인건비 등이 차례로 오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식당들도 추가 인상에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릴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소비자물가는 전년 대비 5.1% 올랐는데, 공업제품(6.9%), 전기·가스·수도(12.6%) 같은 공공요금이 물가 상승을 주도했다. 전체 서비스 물가 상승률(3.7%)은 아직 평균에 못 미쳤다. 앞으로 오름폭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의미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물가 상승은 물품에서 시작해 서비스로 이어지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한국은 미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 마스크 등 방역 해제 시점이 상대적으로 늦어지며 서비스 물가 상승이 뒤늦게 나타나고 있다”면서 “외식 물가는 한 번 오르면 잘 떨어지지 않아 젊은 직장인 등 가계의 부담이 장기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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