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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탈북민 지원 재단’ 개혁 필요하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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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애란 전 북한인권총연합 상임대표

이애란 전 북한인권총연합 상임대표

굶어 죽지 않으려고 목숨 걸고 찾아온 대한민국에서 탈북민 한성옥씨 모자가 2019년 7월 아사한 지 두 달여 만에 발견돼 한국사회에 충격을 줬다. 매년 음식물쓰레기를 10조원어치 이상 배출하는 나라에서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것이 정상적인가. 당시 3만여 탈북민은 하나같이 억장이 무너졌고 광화문 사거리에 천막을 치고 수개월 동안 천막 농성과 단식 투쟁을 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살던 탈북여성이 백골 시신으로 발견되자 비보를 접한 탈북민들은 또다시 오열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사회적 단절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뜩이나 외롭고 힘든 탈북민들이 더 많이 고립되면서 세상을 등지고 있다.

해결되지 않고 있는 탈북민의 한국사회 부적응 현상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필자의 한국 정착 과정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997년 탈북해 이듬해 입국한 필자는 올해가 대한민국 국민이 된 지 25년째다. 필자가 한국에 왔을 때는 탈북민 숫자가 1000명 미만이었다.

탈북민 아사·고독사 비극 잇따라
현 지원재단은 폐쇄·고립적 운영
한국사회와 소통공간 넓혀줘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IMF 위기로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해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없어 빈집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혹시 이러다 내가 죽으면 내가 언제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 같다는 고독감이 엄습해 몸을 떨었다. 북한은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하는 정권이고 모든 개인은 조직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전체주의 국가다. 북한은 개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조직에 강제로 들어가야 한다. 북한에서 조직 생활 참여는 강제적이고 수동적이다. 반면 한국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고 어떤 조직도 강요가 없다. 누구도 누구를 강제하지 않는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이 선택해서 자신이 찾아가야 한다. 누가 누구를 부르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하고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탈북민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정보와 신뢰·신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북민은 한국사회에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매우 척박한 상태다.

흔히 6·25전쟁 시절에 월남한 실향민의 성공 사례를 많이 거론하지만, 탈북민과 실향민은 사회적 환경과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실향민은 일시에 대규모로 월남했기에 어느 정도 커뮤니티가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이 있었다. 사회경제적 환경이 비슷했고 어떤 조직이든 큰 이질감이 없었다. 같은 동네 이웃이나 친인척이 함께 온 경우도 많았기에 탈북민과는 사회경제적·문화적 환경이 크게 다르다.

탈북민은 거주 이전과 여행의 자유 없이 철저하게 단절된 북한 사회에서 오래 살다 왔다. 한꺼번에 대규모로 온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산발적으로 왔기 때문에 탈북민은 서로 얼굴도 잘 모르고 누가 누군지 신뢰하기도 어려운 구조적 한계에 놓여 있다.

탈북민 대부분은 자율적 조직 생활보다 수동적·강제적 조직 생활에 적응돼 있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이자 개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동적·자율적 조직 생활에는 많이 미숙하다. 한국에서 살아보니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신용이고 서로를 신뢰하고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이런 생태적 특징 때문에 한국사회를 학연·지연·혈연 사회라 특징짓기도 한다.

탈북민의 아사·자살·고독사와 재입북 등 부적응 현상은 탈북민이 스스로 몸담고 신용을 쌓고 신뢰를 보여줄 공동체 형성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탈북민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탈북민이 탈북민 공동체를 통해 한국사회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에 의한, 정부를 위한, 정부의 탈북민 공동체가 아니라 탈북민에 의한, 탈북민을 위한, 탈북민들의 자율·자활 공동체가 절박하게 필요하다.

탈북민 정착을 위해 설립됐지만, 정치인들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폐쇄적·관료적으로 운영되는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남북하나재단)을 개혁해야 한다. 탈북민 사회가 부적응집단이 아니라 한국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탈북민이 제 역할을 할 기회를 주는 구조적인 개혁을 바란다. 탈북민들도 개인을 넘어 탈북민 공동체가 성공하는 것이 더 큰 성공으로 가는 길임을 인식하고, 탈북민 공동체 형성과 성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애란 전 북한인권총연합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