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 차이나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시장경제 몰랐던 황장엽, 북한 지식인의 한계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19〉 실망스러웠던 황장엽 면담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벌써 26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한국 사회를 온통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1997년 2월 12일 황장엽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망명한 일이다. 우리에겐 낯선 직책이지만 공산당 1당 체제에서 당 비서는 최고위 권력층에 속한다. 평양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낸 황 전 비서는 북한 통치이념인 주체사상의 창시자로도 통했다. 중국 베이징에서 우리 대사관으로 탈출한 그는 필리핀을 거쳐 같은 해 4월 국내로 들어왔다.

당시 나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한 재정경제원에서 국제협력관(국장급)을 맡고 있었다. 담당 업무에는 남북 경제교류도 포함됐다. 어느 날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서 연락이 왔다. 황장엽 심문팀에 경제 부처도 참여해 달라고 했다. 나는 강만수 차관과 함께 황 전 비서를 만나러 갔다. 강 차관은 잠깐 있다가 돌아가고 내가 주로 대화를 나눴다.

안기부 요청에 97년 황장엽 만나
“값싼 북한제품 도입” 구상에 당황
중국과 북 경유 백두산관광 협상도
“버스 치외법권 보장” 요구에 결렬

1997년 4월 20일 필리핀을 거쳐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한 황장엽(왼쪽) 북한 노동당 전 비서가 비행기 출구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오른쪽은 황 전 비서의 측근으로 함께 탈북한 김덕홍 조선여광무역회사 총사장. [중앙포토]

1997년 4월 20일 필리핀을 거쳐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한 황장엽(왼쪽) 북한 노동당 전 비서가 비행기 출구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오른쪽은 황 전 비서의 측근으로 함께 탈북한 김덕홍 조선여광무역회사 총사장. [중앙포토]

대화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명색이 북한의 최고 지식인이라고 하는데 시장경제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황 전 비서는 통일이 남북 모두에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것이라며 이런 논리를 폈다. “남한 제품은 품질이 좋지만 가격이 비쌉니다. 북한 제품은 품질이 나쁘지만 가격이 쌉니다. 남한이 만든 고급품은 고소득자에게 배분하고 북한이 만든 저급품은 저소득자에게 배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시장경제 원리의 기초부터 설명해줘야 하는지 난감했다. 그때 이미 국내에는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저렴한 가격에 수입품이 들어오고 있었다. 북한산 저급품을 남한에 가져왔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사겠다는 소비자가 얼마나 있을까. 어쩌다 호기심으로 사는 건 몰라도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방법이 아니었다. 황 전 비서의 주장은 개방경제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원래 이틀로 예정했던 황 전 비서와의 면담은 하루 만에 끝냈다. 안기부는 북한 경제에 대한 정보를 얻기를 원했다. 나는 안기부 담당자에게 말했다. “더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쪽에서 가르쳐 줘야 할 형편입니다.” 북한식 폐쇄경제의 한계가 말할 수 없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막대한 청구서로 돌아온 동서독 통일

그 무렵 독일 아데나워재단 초청으로 옛 동독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대학교수 몇 명과 함께 두 주일 동안 돌아다니며 옛 동독 총리 등 주요 인사를 만났다. 독일 통일 이후 7년 만에 옛 동독 지역이 어떻게 변했는지 자세히 관찰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인프라 철거 비용이었다. 옛 동독 지역은 도로부터 엉망이었다. 성능 좋은 서독제 밴을 빌렸는데 길이 나빠 잘 달릴 수가 없었다. 안내자 설명을 들으니 기가 막혔다. 옛 동독이 깐 도로는 워낙 형편없어서 철거하고 새로 깔아야 했다. 기존 도로를 철거하는 비용이 새로 도로를 건설하는 비용과 맞먹는다고 했다.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옛 동독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던 화학공장이 있었다.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공장을 짓다 보니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었다. 공장 주변 환경오염도 걱정스러운 수준이었다. 공장을 철거해야 하는데 새로 공장을 짓는 것의 세 배 정도 비용이 든다고 했다. 옛 공산권 중에선 비교적 잘사는 편에 속했다는 동독이 이 정도였다.

통일 이후 옛 동독 지역에 설립한 경제연구원도 방문했다. 우리의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비슷한 곳이었다.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유능한 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연구원장은 숲속의 아름다운 저택을 가리키며 원장 사택이라고 했다. 부인과 두 딸이 있는 그는 사택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저렇게 멋진 집이 있는데 가족들이 안 오려고 합니다. 옛 동독 지역에서 어떻게 살겠느냐는 거죠.” 그는 독일 사람들이 사고방식의 동질성을 회복하려면 적어도 30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제회의 북한 대표에 영한사전 선물

강만수

강만수

북한 관련 업무를 하며 북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97년 11월 17~18일 베이징에서 열렸던 두만강 유역개발계획(TRADP) 정부 간 조정위원회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주도로 남북한과 중국·러시아·몽골이 참여한 국제회의였다.

원래 우리 측 수석대표는 강만수 차관이고 나는 차석대표였다. 회의를 앞두고 갑자기 북한의 김정우 수석대표(대외경제위원회 부위원장)가 불참을 통보해왔다. 그러자 강 차관도 참석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내가 수석대표 대행을 맡았다. 북한에선 림태덕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이 대표로 나왔다.

그 무렵 국내는 외환위기 일보 직전의 심각한 상황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같은 해 11월 19일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전격 경질하고 임창열 부총리를 임명했다. 이날 오전까지 중국 인사들을 만나던 강 차관은 부총리 교체 소식을 듣자 오후에 바로 귀국했다.

회의에 앞서 북한 쪽에 줄 선물로 영한사전을 챙겼다. 호텔 회의장 앞에서 북한 대표를 만나 선물을 준비했다고 전했다. 처음엔 거절하기에 이렇게 말했다. “애들 공부하는 데 도움 되라고 영한사전을 가져왔습니다.” 애들 공부라면 마음이 약해지는 게 남북한이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쪽에서 방 번호를 알려주기에 영한사전 50권, 한영사전 50권을 박스에 담아 갖다 뒀다.

다음 날 아침 확인했더니 박스가 그대로 있었다. 회의 자리에서 북한 대표를 만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감시원 같은 사람이 두 명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북한 대표가 귓속말로 조용히 말했다. “약속이 다르잖아요.” 내가 설명했다. “어떻게 한 권만 드립니까. 주변에도 나눠주라고 50권을 가져왔습니다.” 나중에 다시 확인했더니 박스는 자리에 없었다.

백두산 관광객 신변보장 방안에 이견

그때 중국에서 우리 쪽에 비밀 협상을 제안해왔다. 남북한과 중국이 손잡고 백두산 관광 사업을 하자고 했다. 동해안에서 북한 원산항까지는 배로, 원산에서 백두산까지는 버스로 간다는 구상이었다. 90년대 후반은 중국이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돈 되는 사업이라면 국가가 나서 어떻게든 성사시키려 하는 분위기였다.

협상 대표였던 나는 관광객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원산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버스 안을 외교공관처럼 치외법권으로 해달라고 했다. 국제법으로 북한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구역으로 해야 우리 관광객이 안심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중국에선 난감하다는 반응이었다. “중국이 운영하는 버스입니다. 우리가 안전을 보장하는데 뭐가 더 필요합니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국민 안전을 어떻게 남의 나라에 맡기겠습니까.” 사실 논리적으로 보면 중국의 주장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국민 정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장·차관도 아니고 국장급 대표로선 쉽게 양보하기 어려웠다. 결국 백두산 관광 협상은 결렬됐다.

자갈밭 같았던 북한 공항 활주로

97년에는 북한 땅을 직접 밟은 적도 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일원으로 방북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재임하던 94년 북한과 미국의 제네바 합의로 탄생한 국제기구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은 국제 컨소시엄으로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는 게 북미 합의의 골자였다.

동해안에서 배를 타고 원산 근처 항구로 들어갔다.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겪던 시기다. 가는 곳마다 너무나 비참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산이 어찌나 황량했는지 나무가 두세 그루밖에 없었다. 지나가는 주민의 옷차림은 노숙자보다 못한 넝마 수준이었다. 경비를 서는 군인은 어찌나 말랐는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기차를 탔는데 의자에 빨간 쿠션이 있었다. 푹신한 줄 알고 털썩 앉았더니 엉덩이가 깨질 듯 아팠다. 가짜 쿠션이었다. 밤 기차였는데 밖을 가리려고 커튼을 쳤다. 커튼을 젖히니 전체가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멀쩡한 게 하나도 없었다.

북한에서 나올 때는 원산공항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고려항공 민항기를 탔다. 승무원이 좌석 선반에 짐을 올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줬다. 곧 이유를 알게 됐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는데 자갈밭처럼 우당탕 깨지는 소리가 났다.

독일과 북한을 둘러보며 흡수통일론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됐다. 무조건 합친다고 저절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북한의 공장과 생산시설은 대부분 국제 경쟁력이 없을 것이다. 통일 후 개방경제 체제가 되면 가동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북한의 철도 총연장은 남한보다 길다고 하는데 철거 비용이 더 들지도 모를 일이다. 북한 주민에 대한 교육과 사회보장에도 막대한 돈이 들어갈 것이다. 결국 엄청나게 많은 준비가 되지 않으면 함부로 통일을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