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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비단옷 위에 삼옷’ 한국미술의 DN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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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12년 전, 한·일 건축가와 디자이너들과 함께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을 찾았습니다. 병산서원은 한국 건축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죠. 당시 이곳을 처음 방문한 일본 건축가 구로가와 마사유키가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실제 와보니 정말 감동”이라며 거듭 감탄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처럼) 흙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한 말도 잊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난 것은 최근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의금상경(衣錦尙絅)’이란 제목의 전시를 볼 때였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회화작가 15명의 작품을 한데 모은 전시인데요, 작품을 보며 그가 말했던 ‘흙의 느낌’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박영하, ‘내일의 너’. 캔버스에 혼합재료, 182x227.5㎝. [사진 학고재]

박영하, ‘내일의 너’. 캔버스에 혼합재료, 182x227.5㎝. [사진 학고재]

특히 박영하(69)의 그림이 그랬습니다. 그는 시인 박두진(1916~1998)의 아들인데요, 그가 ‘내일의 너’라는 시적인 제목으로 그린 추상화는 흙으로 쌓은 시골 담벼락, 깊은 산 속의 바위 표면을 닮았습니다.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시간의 깊이를 드리운 캔버스가 마음을 기대고 싶은 푸근한 벽처럼 느껴집니다.

기법이나 표현 양식이 제각각인 작가들을 한데 묶은 것은 ‘의금상경’이라는 키워드입니다. 이 말은 ‘비단옷 위에 삼(麻)옷을 걸치다’라는 뜻으로, 화려한 형식을 감추며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을 표현할 때 쓰인다고 합니다.

50여년간 백색의 단색화를 그린 이동엽(1946~2013), 붓을 쓰지 않고 손가락에 물감을 입히고 눌러서 그림을 그리는 최명영(82)의 그림은 오랜 노동으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몸으로 치열한 전투를 치르듯이 캔버스에 꿈틀거리는 손의 흔적을 남긴 박인혁(45)을 비롯해 본관과 신관에서 만나는 총 55점의 작품은 ‘그리기’가 정신적 수행의 한 과정임을 말하는 듯합니다.

최명영, 평면조건 22-710, 2022, 캔버스에 유채, 130X130cm.[사진 학고재]

최명영, 평면조건 22-710, 2022, 캔버스에 유채, 130X130cm.[사진 학고재]

김영헌, p22049_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2, 린넨에 유채, 112x45cm. [사진 학고재]

김영헌, p22049_일렉트로닉 노스탤지어, 2022, 린넨에 유채, 112x45cm. [사진 학고재]

박인혁, 회색풍경, 2022, 캔버스에 혼합매체, 162x130cm. [사진 학고재]

박인혁, 회색풍경, 2022, 캔버스에 혼합매체, 162x130cm. [사진 학고재]

이 전시를 기획한 이진명 미술평론가는 “오랜 세월을 거쳐 우리에게 내려오고 있는 미의식을 살펴보고 싶었다”며 “단색화 이후 작가들의 작품성과 정신성을 살피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미술을 세계에 널리 알린 ‘단색화 열풍 그 이후’를 준비하는 미술계의 성찰과 고민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번 전시는 요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들의 다채로운 작업을 펼쳐보고, 그 안에서 일관되게 관통하는 우리 문화 유전자를 찾기 위한 탐색 작업인 셈이죠.

한국 현대미술의 힘과 정신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우리 미술계는 지금 중요한 질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한국 단색화 열풍은 미술 시장에서 작품이 주목받고 활력을 얻으려면 미술사 연구가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한국 미술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선 지금이야말로 날카로운 시선과 통찰로 우리 곁의 작가들을 다시 봐야 할 때입니다. 전시는 2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