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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준호의 사이언스&

탈원전 벗어났더니 이번엔 사용후핵연료 처리 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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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논설위원

북대전 덕진동 한국원자력연구원 뒷산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500여m를 올라가니 ‘지하처분연구시설’이란 금빛 간판글을 붙인 콘크리트 터널 입구가 나타났다. 내부 환기를 위한 대형 파이프 두 개가 터널 위로 연결돼 있다. 초록빛 철문을 열고 들어서니 습하고 따뜻한 공기가 밀려왔다. 지하 120m까지 파고든 터널이라, 사계절 영상 16도를 유지하고 있다. 입구에서부터 직경 6m의 터널이 내리막 경사로를 따라 지하로 180m가량 뻗어있다.

이곳은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즉 사용후핵연료 처분을 위한 국내 유일의 지하 연구시설(KURT·KAERI Underground Research Tunnel)이다. 터널의 끝엔 사용후핵연료를 영구보관하기 위한 구리용기 모형 등 다양한 연구·실험 시설들이 배치돼 있다.

원전 내 저장시설, 10년 내 포화
‘내 임기땐 안 된다’ 시간만 보내
영구 저장시설 기술적으로 가능
‘고준위특별법’ 국회 문턱 넘어야

지난 10일 북대전 덕진동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위치한 지하처분연구시설(KAERI Underground Research Tunnel)의 입구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10일 북대전 덕진동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위치한 지하처분연구시설(KAERI Underground Research Tunnel)의 입구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지성훈 한국원자력연구원 사용후핵연료 저장처분기술개발부장은 “사용후핵연료는 궁극적으로 지하 500m 연구시설을 이용한 심층처분 안전성 실증연구가 필수”라며 “한국은 지금껏 관심도 예산도 부족해 지하 100m 연구시설을 만드는 데 그쳤지만, 이제라도 국제표준에 맞는 지하연구시설(URL)을 준비해야 제때 영구처분시설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탈(脫) 원전’을 벗어났더니, 이번엔 사용후핵연료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가동 중인 원전 25기에서 나오는 폐연료봉을 임시로 보관하는 시설이 조만간 포화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3분기 기준 국내에서 지금껏 발생한 사용후핵연료는 총 1만8600t에 달한다. 모두 원전 내 수조 등 임시저장시설에 보관돼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0일 설명회를 열고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기반으로 한 사용후핵연료 포화 시점 재산정 결과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전남 영광의 한빛원전은 2030년, 경북 울진의 한울 원전은 2031년, 부산 기장의 고리원전은 2032년에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이 포화상태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 전망보다 1~2년 단축된 수치다. 현 정부의 원전 확대 정책 등으로 사용후핵연료 포화 시점이 예상보다 빨라진 탓이다.

지성훈 사용후핵연료저장처분연구단 저장처분기술개발부장(왼쪽)이 본지 최준호 기자에게 시설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성훈 사용후핵연료저장처분연구단 저장처분기술개발부장(왼쪽)이 본지 최준호 기자에게 시설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사용후핵연료는 원자로에서 나온 후에도 오랫동안 높은 방사능 농도와 열을 방출하기 때문에 고준위방사성폐기물로 분류돼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1차로 원자로 건물 내 저장수조로 들어가 냉각되고, 이후 다른 저장수조나 건·습식 중간저장시설로 옮겨진다. 하지만, 쓰고 남은 핵연료에는 반감기가 수만년 이상인 방사성물질이 있다. 이 때문에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사용후핵연료를 최종 처분할 때는 지하 500m 이상 깊은 곳에 심층 처분하는 것을 권고하고 있다.

영구저장시설은 기술적으로 가능할까. 주한규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은 “사용후핵연료는 5㎝ 두께의 구리 용기에 담아 지하 500m 암반에 구멍을 내고 묻은 다음 주변 방수를 위해 벤토나이트라는 점토질의 광물질로 채우면 위험할 일이 전혀 없다”며 “반핵운동가들이 위험을 과장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사용후핵연료에 대해 과도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선진사례가 있다. 핀란드는 지하 깊숙한 곳의 암반에 구멍을 내 사용후핵연료를 묻는 영구처분시설을 2025년 세계 최초로 운영한다. 스웨덴도 같은 시설을 2030년대 초 운영할 예정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원전 선진국’을 자처해온 한국은 어떨까. 정치권과 행정부는 그간 사용후핵연료 처리를 원전 부지 내 임시저장시설에 두는 미봉책으로 일관해왔다. 원인은 ‘님트’(Not in My Term). ‘내 임기 내에 (곤란한 일은)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 위로는 국회와 대통령, 아래로는 부처 국·과장까지 모두 님트의 ‘노예’로 지내왔다.

부안사태(2003년)·안면도사태(1990년) 등이 재발할까 몸을 사려왔다.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을 건설하려던 계획이 알려지면서 해당 지역에 대규모 소요 사태가 일어났던 아픈 기억이다. 안면도에선 주민과 환경단체가 들고 일어나 경찰서에 불이 나고 경찰관이 연금당하는 홍역을 치렀다. 관련 계획은 취소되고, 장관이 물러나야 했다. 부안에선 주민 시위가 거세지면서 1만 명이 넘는 경찰이 배치되고, 군수가 시위대에 집단폭행 당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사용후핵연료는 계속 쌓여갔지만, 정권이 여러 번 바뀌어도 대책은 겉돌았다. 지난 탈원전 정부는 한술 더 떴다. 원전 건설이 아닌 사용후핵연료 처분을 위한 연구도 어려워졌다. 지성훈 원자력연구원 부장은 “지난 정부에서도 원전은 가동되고 사용후핵연료는 계속 나왔지만, 지하처분연구시설(KURT)을 위한 예산은 되레 깎였다”고 말했다. 원자력학계의 한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지만, 지난 정부는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이 포화하면 계획보다 원전을 더 빨리 닫을 수 있으니 임시저장시설 증설이나 영구처분시설 관련 연구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했다.

최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이 한국 원전 역사 45년 만에 처음으로 국회 문턱에 올라섰다. 민주당 안을 포함, 3개 법안이 발의돼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위에서 심의 중이다. 김영식 국민의힘 의원은 “영구처분시설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여야가 뜻을 같이하고 있다”며 “양 당간 이견이 좀 있지만 합의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이상 미루면 한국인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에 살든지, 거리로 나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