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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 논란에 불 지핀 백마…2013년생 '김주애 띄우기' 숨은 뜻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북한이 지난 8일 군 창건 75주년 열병식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딸 김주애를 등판시켜 국내외 주목을 받고 있다. 김주애는 지난해 11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7형' 시험발사 현장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뒤 석 달이 안 되는 기간 다섯 차례 김정은과 함께 등장해 파격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지금까지 김주애가 등장했던 다섯번은 모두 북한 권력의 핵심인 군 관련 행사였다. 특히 열병식에선 김정은과 나란히 주석단까지 올랐다. 북한의 역대 권력자들이 열병식을 후계 구도를 구체화하는 계기로 삼아왔다는 점에서 사실상 이번 열병식의 '주인공'이 된 김주애가 김정은에 이은 후계자로 낙점된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조선중앙TV는 지난 8일 개최된 인민군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 녹화중계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백두산을 올랐던 백마와 김정은의 딸 김주애 소유로 추정되는 백마를 공개했다. 맨 오른쪽이 김정은 백마, 그 뒤가 김주애 소유 추정 백마.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조선중앙TV는 지난 8일 개최된 인민군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 녹화중계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백두산을 올랐던 백마와 김정은의 딸 김주애 소유로 추정되는 백마를 공개했다. 맨 오른쪽이 김정은 백마, 그 뒤가 김주애 소유 추정 백마.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후계자 논란에 불 지핀 '백마'

북한 매체들은 김주애를 '사랑하는 자제분'에서 '존귀하신 자제분', '존경하는 자제분' 등으로 칭하며 급격히 예우 수준을 높였다. 특히 조선중앙TV는 지난 9일 열병식 녹화중계에서 열병 행렬의 선두에 등장한 김정은의 말에 뒤이어 등장한 백마를 "사랑하는 자제분께서 제일로 사랑하시는 준마"라고 호명하면서 후계 논란에 불을 지폈다.

북한은 김정은 일가의 정통성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백마를 활용해왔다. 이 때문에 열병 행렬 선두에서 김주애의 백마가 김정은의 말을 뒤따라 등장하는 장면은 그대로 김정은의 뒤를 이은 후계 구도를 암시하는 뜻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북한이 지난 8일 저녁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조선인민군 창건일(건군절) 75주년을 맞아 진행한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딸 김주애와 함께 열병부대를 사열하는 모습. 뉴스1

북한이 지난 8일 저녁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조선인민군 창건일(건군절) 75주년을 맞아 진행한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딸 김주애와 함께 열병부대를 사열하는 모습. 뉴스1

전문가들도 북한이 열병식 선두 행렬에 의도적으로 김주애의 백마를 배치한 것과 관련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을 완성한 북한이 최소한 '4대 세습'으로 김씨 일가의 권력을 이어갈 뜻을 공식화한 것"이란 데는 이견이 없다. 김주애가 권좌에 오른다고 예단할 순 없지만, 최소한 북한의 권력 구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는 해석이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북한이 김주애를 열병식에 등장시킨 것은 후계자 내정 보다는 백두혈통의 영속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며 "북한의 권력승계는 앞으로도 백두혈통을 중심으로 이어질 것이란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원산댁' 아들 김정은式 세습법

김주애가 일단 후계자 후보군에 올랐다는 해석이 나오지만, 아직 30대인 김정은이 10대 초반에 불과한 딸을 앞세워 벌써 권력을 이양할 준비를 하는 것은 지금까지 3대를 이어온 북한의 권력 세습 과정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과거 김일성 주석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1974년 장자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정했지만, 제6차 당대회가 열린 1980년이 돼서야 그의 후계자 지위를 공식화한 후 권력의 한 축을 내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2008년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한 뒤 2010년 9월 조선노동당 제3차 당 대표자회의를 통해 이를 공식화했다.

각각 38세와 26세 때로 추정되는 김정일과 김정은의 후계 낙점 시기와 비교하면, 북한의 '김주애 띄우기'는 과도하게 빠르다는 뜻이다. 김정은의 자녀 공개와 관련해선 김정은의 '출신 배경'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 있다.

김정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실이 아닌 북송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의 셋째 부인 고용희의 아들이다. 1960년대 당시 북송선이 도착한 곳이 원산이라 북한 핵심계층 사이에선 고용희가 한때 '원산댁'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정은은 '백두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집권 초기 정통성에 대한 의구심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생모인 고용희의 모습. 군복 차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김 위원장을 고용희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연합뉴스 촬영.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생모인 고용희의 모습. 군복 차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김 위원장을 고용희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연합뉴스 촬영.

전문가들은 일종의 '방계' 출신인 김정은이 집권 초기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하는 등 잠재적 견제 세력을 숙청하는 방식의 철권통치를 벌였던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김정은은 후계자로 늦게 공개되면서 집권 초기에 정치적 반대와 권력 투쟁을 경험했다"며 "이런 경험이 조기에 4대 세습 구도를 기정사실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과 떨어져 언제 숙청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은둔의 유년기를 보냈던 자신과 달리 자식들에게 '백두혈통'의 일원이란 상징성을 조기에 공개적으로 부여해 후계구도를 연착륙시키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것이란 설명이다.

"김주애도 김정은 띄우기 수단"

그럼에도 2013년생으로 10대 초반인 김주애를 북한의 후계자로 단정하긴 이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앞선 북한의 후계자 내정 과정과 비교해도 김주애를 후계자로 판단하기엔 거쳐야 할 절차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0년 9월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당 중앙기관 성원 및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 참가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앞줄 왼쪽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 이영호 당시 군 총참모장, 김정일 위원장. 연합뉴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0년 9월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당 중앙기관 성원 및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 참가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앞줄 왼쪽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 이영호 당시 군 총참모장, 김정일 위원장. 연합뉴스

오경섭 연구위원은 "북한이 후계구도와 관련해 내놓은 직접적인 언급은 아직 없었으며 김정은의 딸 앞에 높임말을 붙여준 것에 불과하다"며 "김주애는 아직 후계자 후보 중 한명으로 봐야 하고, 오히려 조기에 김주애가 대중 앞에 나타난 배경은 백두혈통을 강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김정은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려는 포석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실제 북한은 미성년인 김정은의 딸을 대량살상무기가 등장한 열병식의 주석단에 세워 김정은의 잔혹한 이미지를 희석하는 동시에, 열병식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성공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국경을 3년째 봉쇄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 분야에서 성과를 냈다는 점을 과시한 무대를 마련하는데 '노마스크'로 진행된 열병식과 천진난만한 표정의 김주애가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딸 김주애와 함께 건군절 75주년 기념연회에 참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8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 가족 뒤에는 (왼쪽부터) 박수일 북한군 총참모장, 강순남 국방상, 정경택 군 총정치국장, 황병서 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정자세로 서 있는모습이다.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딸 김주애와 함께 건군절 75주년 기념연회에 참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8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 가족 뒤에는 (왼쪽부터) 박수일 북한군 총참모장, 강순남 국방상, 정경택 군 총정치국장, 황병서 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정자세로 서 있는모습이다. 연합뉴스

이 때문에 북한 관영 매체들이 김주애에 대한 예우를 갖추며 백두혈통의 권위를 강조한 배경은, 김주애 띄우기가 아닌 현재의 권력자인 김정은 유일체제에서 김정은을 더 띄우려는 선동 수단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김정은의 권력 유지를 위해 김주애도 하나의 상품으로 포장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최대 광고주인 김정은을 위해 노동당이란 광고대행사가 내놓은 열병식이란 고도의 마케팅이 이번에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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