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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는 삼국지](9) 초선의 추파에 삼혼칠백이 녹아내린 동탁과 여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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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표가 손견의 시신과 사로잡힌 황조를 교환하려고 하자 모사인 괴량이 반대했습니다. 강동의 호랑이 손견은 죽고 그 아들들은 아직 어리니 이참에 번개처럼 쳐들어가면 강동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유표는 황조를 잃을 수 없다며 괴량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동탁도 손견이 죽었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동탁은 손견의 장남인 손책이 17살임을 듣고는 아예 그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동탁의 교만 방자함은 날이 갈수록 더했습니다. 동탁은 스스로 상부(尙父)가 되어 천자와 똑같은 의장을 갖췄습니다. 아우와 조카는 물론 자신의 일족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열후로 봉했습니다. 장안에서 북쪽으로 250리 떨어진 곳에 별장인 미오성을 건설했습니다. 그 크기는 장안성과 같았습니다. 동탁은 이곳에 20년 동안 먹을 양곡을 보관하고, 산해진미와 금은보화를 산처럼 쌓아두었습니다. 동탁은 이곳에 거처하며 보름이나 한 달에 한 번꼴로 장안성을 다녀왔습니다.

동탁의 폭정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복한 군졸 수백 명의 팔다리를 그 자리서 자르고 눈알과 혀를 뽑아 가마솥에 삶아 죽였습니다. 비명과 통곡소리가 장안을 진동했지만 동탁은 낄낄대며 즐거워했습니다. 백관을 모아 술잔치를 하던 중 사공(司空) 장온을 끌어내 ‘원술과 결탁해 나를 죽이려 했다’며 목을 베는 등 공포정치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사도(司徒) 왕윤은 집으로 돌아와 잠 못 들고 근심하다 후원을 배회했습니다. 이때 왕윤이 딸처럼 키워온 가기(歌妓) 초선은 그가 한숨 쉬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초선은 왕윤의 고민이 무엇인지 익히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저를 써야 할 곳이 있으시면 분부하여 주소서. 만 번 죽는다 해도 사양하지 않겠나이다.

초선 [출처=예슝(葉雄) 화백]

초선 [출처=예슝(葉雄) 화백]

왕윤은 초선에게 큰절을 올리고 막중한 임무를 지시합니다. 즉, 초선이 연환계(連環計)를 써서 동탁과 여포를 갈라놓은 후, 여포가 동탁을 죽이게끔 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에 초선은 살신성인으로 왕윤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초선은 알다시피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입니다. 달마저도 그녀의 미모를 보고 부끄러워 숨을 정도였으니, 하물며 호색한인 동탁과 여포는 어땠겠습니까. 궁전에 넘쳐나는 궁녀들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왕윤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합니다. 여포를 집으로 초대해 후하게 대접하며 초선을 소개합니다. 초선은 왕윤의 분부에 따라 여포에게 술을 따라주었습니다. 여타의 작가들은 이 장면을 ‘초선이 여포에게 술을 따라 올렸다’고 간단히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연환계의 성공 여부가 달린 중요한 장면입니다. 원본에는 없지만 월탄 박종화의 표현은 그야말로 완벽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초선은 부끄러운 듯 아미(蛾眉)를 숙인 채 곱게 일어나 여포를 향해 절을 올린 후, 이내 옥 같이 흰 손을 들어 황금 술잔을 잡고, 호박(琥珀)빛의 좋은 술을 남실남실 따라서 여포한테 두 손으로 바쳤다. 여포의 눈과 초선의 눈이 마주쳤다. 여포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빛 같았고, 초선의 눈은 그믐달처럼 요염하고 싸늘했다. 여포의 타오르는 눈은 한시도 초선한테서 떠나지를 못했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떠날 수가 없었다.

어떻습니까. 감탄을 금치 못하는 문장력이 아닌가요. 이 한 문장으로 여포는 초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 역사소설의 대가답습니다. 이러한 여포에게 왕윤은 결정타를 날립니다. 초선을 첩으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여포가 왕윤에게 견마지로를 다하겠다고 다짐하며 초선을 바라봅니다. 이때 초선의 행동을 다시 월탄의 필치로 살펴보겠습니다.

초선도 붉은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자주 추파를 흘려 정을 보냈다. 여포의 삼혼칠백(三魂七魄)은 초선의 예쁜 추파 속으로 녹아 흘렀다.

인간의 정신을 관장하는 것을 혼(魂)이라 하고 육신을 관장하는 것을 백(魄)이라고 합니다. 삼혼칠백(三魂七魄)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혼과 백이 각각 3개와 7개가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한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여포의 삼혼칠백이 초선의 추파에 녹았으니 여포의 삶은 이제 초선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왕윤 [출처=예슝(葉雄) 화백]

왕윤 [출처=예슝(葉雄) 화백]

왕윤은 이어 동탁을 집으로 초대해 극진한 말로 치켜세우고, 초선을 선보입니다. 동탁 또한 초선을 보자 삼혼칠백이 녹아들었습니다. 이에 초선이 앵두 같은 입술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노래를 한 곡조 불러 동탁의 마음을 옴짝달싹 못 하게 움켜잡습니다.


앵두 같은 붉은 입술 방긋이 열자 一點櫻桃啓絳唇

옥구슬 사이로 양춘이 피어나네. 兩行碎玉噴陽春

향기로운 혀끝으로 강철 검을 뱉어내어 丁香舌吐衠鋼劍

나라 어지럽히는 간신들 목 베려하누나. 要斬奸邪亂國臣

동탁은 그 밤으로 초선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초선과 지내느라 달포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포는 왕윤의 말만 믿고 양부인 동탁이 자신과 초선을 짝지어 줄 것이라 고대했으나, 오히려 동탁에게 초선을 뺏겨 너무나 분했습니다. 동탁은 동탁대로 여포가 미웠습니다. 왕윤이 자신에게 준 애첩을 여포가 가로채려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동탁은 자신의 모사인 이유의 설득으로 여포에게 상을 주며 그를 다독였지만, 동탁과 여포의 관계는 금이 가고 있었습니다.

대노한 동탁이 화극을 던지자 이를 쳐내고 도망치는 여포 [출처=예슝(葉雄) 화백]

대노한 동탁이 화극을 던지자 이를 쳐내고 도망치는 여포 [출처=예슝(葉雄) 화백]

여포가 초선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느 날, 동탁이 정사를 논하려 헌제를 만나러 가자 여포는 그 틈을 타 곧장 초선을 찾아갔습니다. 초선은 후원의 봉의정으로 여포를 데리고 가 여포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슬퍼하며 자결하려는 척 연기를 합니다. 삼혼칠백이 녹아내린 여포가 그냥 둘 리가 있나요. 여포는 흐느끼는 초선을 끌어 앉고 “당신을 아내로 삼지 못한다면 나는 영웅이 아니오”라며 안심시킵니다.

동탁은 여포가 곁에 없는 것을 눈치채고, 의심이 들어 즉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 적토마가 매여 있었습니다. 동탁은 봉의정에서 초선과 밀회를 즐기는 있는 여포를 발견하고는 눈이 뒤집혔습니다. “네 이놈, 여포야!” 벼락 치듯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여포는 깜짝 놀라 줄행랑을 쳤습니다. 동탁은 무기 방천화극을 들고 쫓아가며 여포에게 힘껏 던졌습니다. 여포는 이를 쳐내고 잽싸게 도망쳤습니다. 봉의정 난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초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제 여포와 동탁 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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