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시공 131명 체포영장…“에르도안, 성난 민심 모면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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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구조 및 복구 작업이 진행되는 카라만마라슈 지진 피해 현장. [뉴스1]

지난 10일 구조 및 복구 작업이 진행되는 카라만마라슈 지진 피해 현장. [뉴스1]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사망자가 3만 명에 육박하는 가운데 튀르키예 정부는 이번 지진에 무너진 건물들을 지은 건설업자들에 대해 부실시공 책임을 물어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이번 수사가 오는 5월 대선을 앞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쏠린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민심 달래기용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1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뉴욕타임스(NYT) 등은 튀르키예 정부가 이번 지진으로 붕괴된 건물의 건설업자 131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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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에서 150시간 만에 구조된 어린이. [로이터=연합뉴스]

12일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에서 150시간 만에 구조된 어린이. [로이터=연합뉴스]

튀르키예 법무부는 무너진 건물들이 1999년 정비된 내진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피해를 키운 정황이 있는지 조사하고 건설업자들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으라고 지시했다.

이날 하타이에서 147시간 만에 구조된 12세 시리아 소년. [AFP=연합뉴스]

이날 하타이에서 147시간 만에 구조된 12세 시리아 소년. [AFP=연합뉴스]

튀르키예 정부는 99년 1만7000명의 사상자를 낸 북서부 대지진 이후 내진 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내용 등을 담아 건축법을 개정했다. 2018년엔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의 건축물에 고품질 콘크리트를 쓰고 철근을 보강하도록 건축법을 보완했다. 하지만 건설업자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저급 콘크리트나 철근을 사용하는 등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부실 건축물이 이번 강진에 대거 무너지면서 막대한 인명 피해로 이어졌다. 튀르키예 재난관리국(AFAD)에 따르면 현재까지 1만2000개 이상의 건물이 붕괴하거나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11일 튀르키예 남부 아디야만에서 130여 시간 만에 구조된 60세 남성.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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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에 체포된 건설업자 중에는 이번 지진에 직격탄을 맞은 가지안테프에 위치한 호화 복합단지의 건설업자 메흐메트 에르탄 아카이가 포함됐다. 가지안테프 검찰청은 붕괴된 단지의 잔해를 수집해 증거 조사를 마친 뒤 그를 과실치사와 공공건축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하타이주에 250세대로 이뤄진 12층 아파트를 건설한 메흐메트 야사르 코스쿤은 이날 이스탄불공항에서 남유럽 국가인 몬테네그로행 비행기를 타려다 체포됐다. 그가 세운 아파트는 이번 지진에 완전히 붕괴돼 ‘죽음의 레지던스’로 불렸고, 최소 수십 명이 사망했다.

건설업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당국과 달리 지진 피해 지역 주민들은 부실 공사를 막지 못한 정부에 분노하고 있다. 특히 정부가 불법·부실 건축물을 대상으로 과태료 등 행정처분을 주기적으로 면제해 주면서 부실을 부추겼다고 본다. 지진으로 어머니를 잃은 메수트 코파랄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면서 “정부는 (개인에게) 빚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당장 찾아서 쫓아가지만, 건축물은 제대로 지어졌는지 확인하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BBC는 “건설업자 구속은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쏠린 비판을 모면하기 위한 조치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튀르키예 당국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에르도안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면 지진 대응을 이유로 대선을 연기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8일 지진 피해 현장을 방문해 “이렇게 큰 재난에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정부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는 부도덕하고 뻔뻔하다”고 주장해 공분을 샀다. 아울러 99년 지진 후 20년 이상 걷어 온 지진세(880억 리라, 약 5조9000억원)의 사용처도 불분명해 정부 비판 여론이 커지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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