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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카레'에 달러 몰래 감췄다…007 방불케한 쌍방울 대북송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이 북한에 800만달러(약 100억원) 이상을 송금한 과정은 ‘007 작전’을 방불케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3일 기소된 김 전 회장의 공소장을 보면 쌍방울은 2019년 한 해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조선아태위)의 송명철 부실장 등에게 800만달러를 전달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변호사비 대납과 대북송금 의혹의 핵심 인물로 꼽혀 온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이 지난달 17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수원지검으로 이송되고 있다. 공항사진기자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변호사비 대납과 대북송금 의혹의 핵심 인물로 꼽혀 온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이 지난달 17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수원지검으로 이송되고 있다. 공항사진기자단

방북비용 대납 시점, 경기도 공문과 ‘일치’

이 가운데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의 방북 초청을 목적으로 김 전 회장이 대납했다는 300만달러는 2019년 11월27일부터 12월18일까지 약 3주에 걸쳐 쌍방울그룹 임직원 수십명을 통해 중국 선양으로 밀반출됐다. 이들은 각자 받은 달러를 화장품 케이스나 책 사이에 숨겨 출국한 뒤 선양공항 화장실에서 대기 중이던 방용철 그룹 부회장이나 직원에게 전달했다. 알루미늄 재질로 된 즉석 카레 포장지에 달러를 밀봉해 세관 검사를 피하려는 시도도 했다고 한다.

특히 이 ‘방북비용 대납’ 시점은 경기도지사 직인이 찍힌 방북 요청 공문 일자와 일치한다. 경기도는 2019년 11월27일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 직인이 찍힌 '민족협력 사업 협의와 우호증진을 위한 경기도대표단 초청 요청' 공문을 시행했다.

이재명 대표가 경기도지사였던 2019년 11월 27일 경기도지사 직인이 찍힌 '방북 초청 요청 공문'. 독자 제공

이재명 대표가 경기도지사였던 2019년 11월 27일 경기도지사 직인이 찍힌 '방북 초청 요청 공문'. 독자 제공

공문 말미엔 “도지사를 대표로 하는 경기도 대표단의 초청을 정중히 요청하는 바이며, 우리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귀 위원회의 헌신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쓰여있었다. 수신처는 조선아태위 위원장, 결재선은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전결이었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이 방북 비용을 대납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공소장에 썼다. 김 전 회장은 2019년 7월 필리핀에서 개최된 제2회 아태평화 국제대회에 참석해 조선아태위 리종혁 부위원장, 송명철 부실장 등과 남북경제협력사업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이재명 지사의 방북을 성사시키려면 미화 300만달러 정도의 비용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고, 이화영 등 ‘경기도 관계자’와 상의한 뒤 비용을 전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스마트팜’ 사업비 대납 500만달러엔 아태협 등장 

김 전 회장 공소장엔 경기도가 2018년 10월 북한과 합의한 남북교류협력사업 중 ‘농림복합사업’ 비용으로 500만달러를 대납한 경위에 대해서도 쓰여있다. 김 전 회장은 2019년 1월23~24일과 같은 해 4월 두 차례에 걸쳐 외화를 북한으로 밀반출했다.

1월 대북 송금 당시엔 아태평화교류협회의 안부수 회장이 등장한다. 검찰은 안 회장이 1월 북한으로 보냈다는 200만달러 중 50만달러에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전직 아태협 관계자는 “안 회장이 50만달러 중에서 7만달러는 2018년 12월 말 쌍방울그룹 계열사에서 아태협 후원 계좌로 받은 3억원 중 8000만원(7만달러)을 인출해 달러로 바꾼 뒤 직접 평양에 들어가 조선아태위에 전달했다”며 “나머지 43만달러 중 14만5000달러는 ‘쪼개기’로 환전해서 옮긴 것이고, 환치기로 180만위안(약 3억3000만원)을 중국에서 받아 그날 저녁에 바로 송명철에게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2018년 11월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왼쪽)가 경기도 성남 제2판교테크노밸리를 방문한 이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아태위) 부위원장(왼쪽 둘째) 등 북한 대표단과 기념촬영하는 모습. 맨 오른쪽은 안부수 아태평화교류협회장. 아태위는 당시 쌍방울그룹의 대북 사업 창구였다. 뉴스1

2018년 11월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왼쪽)가 경기도 성남 제2판교테크노밸리를 방문한 이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아태위) 부위원장(왼쪽 둘째) 등 북한 대표단과 기념촬영하는 모습. 맨 오른쪽은 안부수 아태평화교류협회장. 아태위는 당시 쌍방울그룹의 대북 사업 창구였다. 뉴스1

지배구조 정점 ‘칼라스홀딩스’ 자금도 금고지기 통해 송금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의 금고지기이자 매제인 전 재경총괄본부장 김모 씨가 해외 도피 8개월여 만인 지난 11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의 금고지기이자 매제인 전 재경총괄본부장 김모 씨가 해외 도피 8개월여 만인 지난 11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검찰은 김 전 회장이 방북비용 대납을 위해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던 칼라스홀딩스 법인에서도 자금을 만들었다고 적시했다. 2019년 4월 경기도 스마트팜 사업 대납 비용으로 300만달러를 만들 당시 김 전 회장의 매제이자 금고지기로 불리던 김모 재경총괄본부장이 관여했고, 이 돈을 마카오로 밀반출한 뒤 송명철 부실장에게 전달했다는 내용이 공소장에 담겼다.

지난 11일 태국에서 귀국한 뒤 수원지검으로 압송된 김 전 본부장에 대해 검찰은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혐의로 이르면 12일 오후 구속영장을 청구할 예정이다. 김 전 본부장은 지난해 5월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 지난해 12월 태국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붙잡혔다. 송환 거부 소송을 벌이다 포기하고 도피 생활 8개월여 만에 국내로 돌아왔다.

김 전 본부장은 오랜 국외 도피에 피로감을 호소하다 최근 김 전 회장이 “국내로 돌아와 사실대로 진술하라”고 지시하자 귀국을 결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변호인 선임은 김 전 회장 사건을 맡은 대형 로펌을 택하지 않고, 수원지검 인근의 법률사무소를 접촉한 것으로 파악됐다.

김성태 전 회장은 김 전 본부장 뿐 아니라 대북송금과 증거인멸 등 혐의로 대질조사를 받는 쌍방울 그룹 임직원들에게도 “나야 5년이든 10년이든 징역살이를 하게 되더라도 회사는 살려야 될 것 아니냐”며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검찰 조사를 받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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