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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건설업자 100여명 체포…"대통령 비판여론 모면 위한 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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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터키)·시리아에서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3만 명에 육박하는 가운데 튀르키예 정부는 이번 지진 피해를 키운 주요인으로 건설업자와 관련 책임자를 지목하고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일부 외신은 이번 수사가 조기 대선을 앞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에게 쏠린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민심 달래기용이라고 분석했다.

 11일(현지시간) 튀르키예 하타이주에서 지진으로 파손된 건물 앞을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AFP=연합뉴스

11일(현지시간) 튀르키예 하타이주에서 지진으로 파손된 건물 앞을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AFP=연합뉴스

11일(현지시간) 미국 블룸버그통신과 뉴욕타임스(NYT) 등은 튀르키예 정부가 이번 지진으로 붕괴된 건물의 건설업자 100여 명을 부실공사 혐의로 구속했다고 전했다. 건설업자 체포는 앞서 튀르키예 법무부가 지진 피해를 본 10개 지역 당국에 ‘지진 범죄 수사대’를 설치하라고 지시한 뒤 이뤄졌다.

또 튀르키예 법무부는 무너진 건물들이 1999년 정비된 내진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피해를 키운 정황이 있는지 조사하고 건설업자 및 관계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으라고 지시했다. NYT는 “튀르키예 정부가 이번 지진 피해에 책임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을 지목하고 처벌하기 위해 내린 첫 번째 조치”라고 전했다.

튀르키예 정부는 1999년 1만7000명의 사상자를 낸 북서부 대지진 이후 내진 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내용 등을 담아 건축법을 개정한 바 있다. 2018년에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엔 건축물에 고품질 콘크리트를 쓰고 철근을 보강하도록 건축법을 보완했다.

하지만 건설업자들은 현장에서 비용 절감을 위해 저급 콘크리트나 철근을 사용하는 등 규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로 인한 부실 건축물이 이번 강진에 대거 무너지면서 막대한 인명 피해로 이어졌다고 튀르키예 당국은 보고 있다. 튀르키예 재난관리국(AFAD) 집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1만2000개 이상의 건물이 붕괴하거나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튀르키예 가지안테프 지역에서 붕괴된 건물 사이에서 생존자를 찾고 있다. AFP=연합뉴스

튀르키예 가지안테프 지역에서 붕괴된 건물 사이에서 생존자를 찾고 있다. AFP=연합뉴스

당국에 체포된 건설업자 중에는 이번 지진에 직격탄을 맞은 가지안테프에 위치한 호화 복합단지의 건설업자 메흐메트 에르탄 아카이가 포함됐다. 가지안테프 검찰청은 붕괴된 단지의 잔해를 수집해 증거 조사를 마친 뒤 그를 과실 치사와 공공 건축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하타이주(州)에 250세대로 이뤄진 12층 아파트를 건설한 메흐메트 야사르 코스쿤은 이날 이스탄불공항에서 남유럽 국가인 몬테네그로행 비행기를 타려다 체포됐다. 그가 세운 아파트는 이번 지진에 완전히 붕괴돼 ‘죽음의 레지던스’로 불렸고, 최소 수십명이 사망했다. 지진 직후 튀르키예를 탈출했던 건축업자 2명은 북부 키프로스 니코시아에서 체포됐다. 이들은 아다니시(市)에서 무너진 14층 아파트를 건축했다.

건설업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당국과 달리 지진 피해 지역 주민들은 부실 공사를 막지 못한 정부에 분노하고 있다. 특히 정부가 불법·부실 건축물을 대상으로 과태료 등 행정처분을 주기적으로 면제해주면서 부실을 부추겼다고 본다. 지진으로 어머니를 잃은 메수트 코파랄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면서 “정부는 (개인에게) 빚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당장 찾아서 쫓아가지만, 건축물은 제대로 지어졌는지 확인하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외신은 건축업자의 구속에 대해 “오는 5월 대선을 앞둔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노림수”라고 해석했다. 앞서 지난 8일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진 피해 현장을 방문해 “이렇게 큰 재난을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정부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는 부도덕하고 뻔뻔하다”고 주장해 여론의 공분을 샀다. 아울러 1999년 지진 후 20년 이상 걷어온 지진세(880억 리라, 약 5조9000억 원)의 용처도 불분명해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더욱 커져가는 상황이었다.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튀르키예 당국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에르도안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면 지진 대응을 이유로 대선을 연기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영국 BBC 방송은 “이번 건설업자 구속은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쏠린 비판을 모면하기 위한 조치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에 대통령이 11일 남동부 도시 디야르바키르를 방문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에 대통령이 11일 남동부 도시 디야르바키르를 방문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2일 기준 2만9117명으로 3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튀르키예 사망자는 2만4617명, 시리아 사망자는 약 4500명이다. 마틴 그린피스 유엔 인도주의·긴급구호 담당 사무처장은 “이번 지진은 100년 만의 최악의 참사”라고 했다.

튀르키예 남부 도시 안타키아에는 거리에 시신 가방이 널브러져 있고 건물이 붕괴된 지역에선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해 구조대들이 마스크를 쓴 채 생존자를 찾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도시 외곽 대규모 매장지에는 땅 파는 기계가 쉴 새 없이 대형 구덩이를 파고, 인부들은 시신 가방을 구덩이에 밀어넣고 있다.

튀르키예 지진 피해 지역에는 인력 12만1128명과 굴착기, 불도저 등 차량 1만2244대, 항공기 150대, 선박 22척, 심리치료사 1606명을 투입하는 등 매몰된 생존자 구조 및 구호에 총력을 쏟고 있다. 한국의 긴급구호대는 9일부터 11일까지 총 8명의 생존자를 구조했다.

다만 일부 지역에선 총과 칼로 무장한 약탈대가 기승을 부리면서 구조 작업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약탈대는 강진 피해 지역에서 빈집을 털거나 상점 창문을 깨고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굶주림에 못 이겨 식료품을 훔치고 있지만, 대다수는 옷가게와 전자제품 매장을 털어 값나가는 물건을 싹쓸이하고 있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현금 인출기도 뜯겨 나갔다. 소셜미디어에는 사람들이 훔친 물건을 들고 도망가거나 약탈자들이 주민들에게 두들겨 맞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돌았다.

약탈대와 구호대 간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독일과 오스트리아 구조대는 10일 신원을 알 수 없는 단체와 충돌해 수색 작업을 중단했다. 오스트리아 구조대 대변인은 “하타이 지방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오스트리아 구호대 소속 수십 명이 다른 국제 구호대와 함께 베이스캠프로 피신했다”고 알렸다. 독일 국제수색구조대(ISR)도 안보 상황 변화로 인해 구조 작업을 중단했다.

지진 피해가 발생한 하타이 지역에서 튀르키예 군인이 약탈범을 체포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진 피해가 발생한 하타이 지역에서 튀르키예 군인이 약탈범을 체포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동남부 도시 디야르바크르를 찾아 지진 피해 상황을 점검한 자리에서 “약탈이나 납치 등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은 국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튀르키예는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상황에서 약탈 용의자에 대한 법정 구금 기간을 사흘 늘리는 등 처벌을 강화하도록 하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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