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주취자 신고 한 해 100만건… 권한 없는데 책임만 떠안은 경찰

중앙일보

입력

지난 10일 밤 서울 관악경찰서 신림지구대의 모습. 김민정 기자

지난 10일 밤 서울 관악경찰서 신림지구대의 모습. 김민정 기자

“내가 말하는데 니가 뭔데 XX!”
경북 경산시의 한 파출소에 근무하는 경찰관 A씨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한 손님이 술에 취해 식당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날이었다. “그만하시라”며 제지했지만, 다짜고짜 욕설과 함께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겨우 파출소로 데려왔지만 만취 상태인 그의 행패는 멈추지 않았다. 다른 직원에게 침을 뱉으며 “네 딸래미 초등학교에 내가 찾아간다. 어디 사냐. 내가 강간 전과도 있다”며 도를 넘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유치장에 구금된 남성은 이후에도 내부 아크릴판을 팔꿈치로 부수고 창문을 머리로 들이받아 박살내는 등 난동을 이어갔고, 결국 공무집행방해죄로 송치됐다.

서울 노원구의 한 파출소 소속 경찰관 B씨 역시 ‘술에 취한 등산객이 영업을 방해하고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게 음주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만취한 등산객은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냐” 등의 폭언을 하며 B씨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해당 등산객에겐 최근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됐다.

취객 신고 한 해 약 100만건…“24시간 내내 주취자만 상대”

지난달 4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데오역 인근에서 경찰이 음주 단속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4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데오역 인근에서 경찰이 음주 단속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취객은 지구대·파출소의 단골 손님이다. “지구대 근무하면서 취객에게 욕을 먹거나 맞아 본 적 없는 경찰이 과연 있을까 싶다”(C 경사)고 말할 정도다.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에 접수되는 주취자 신고는 한 해 약 100만건으로, 전체 112 신고 건수의 4.7% 수준이다. 하루 평균 2700건의 신고가 들어오는 셈이다. 실제 신림지구대나 논현1파출소 등 유흥가 일대의 지구대·파출소의 경우 주말을 앞두고 하룻밤 수십 건의 주취 신고가 접수되기도 한다. 영등포역파출소에 근무했던 한 경찰관은 “24시간 내내 주취자만 상대하다가 하루가 다 가곤 했다”고 회상했다.

경찰이 주취자에 대응할 때 법적 근거가 되는 건 경찰 직무집행법이다. ‘술에 취해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재산에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시민을 발견했을 경우, 경찰은 경찰서에 보호하는 등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후엔 2012년 대법원 판례에 따라 피구호자를 가족 등에 먼저 인계해야 한다. 의식 없는 만취자의 경우 응급조치를 하고 주취자 응급의료센터 등에 후송하도록 2021년 발간된 경찰청 매뉴얼에 명시돼 있다.

하지만 규정대로 처리하기 힘든 경우가 더 많다. 일선 경찰관들은 “주취자의 건강 상태를 직접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다 유관기관과 협조도 어려워 사실상 경찰 혼자서 주취 대응 업무를 모두 책임지고 있다”고 호소한다. 한 서울 시내 번화가의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경찰관은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이면 경찰은 건강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대부분 술 깰 때까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쓰러지면 우리 책임이 되는 것”이라며 “병원으로 옮기는 주취자도 가끔 있지만, 겉으로 봤을 때 단번에 조치를 취할 만큼 위급함을 인지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일부”라고 했다.

실제 2012년부터 일부 병원 응급실에 설치된 주취자 응급의료센터는 위급한 상태의 환자만 주로 받아 이용률이 지난해 기준 5%가 채 되지 않는 실정이다. 서울의 한 파출소 소속 경찰관은 “주취자가 들어와도 앉혀 놓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예전엔 경찰서에 주취자 안정실이 있었지만, 2009년부터 폐지되면서 주취자를 보호해 둘 공간 자체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경기도 모처에서 취객이 택시 기사와 언쟁을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해 12월 경기도 모처에서 취객이 택시 기사와 언쟁을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경찰관들은 주취자 귀가 조치 역시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이뤄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익명을 요구한 모 파출소 경찰관은 “주취자가 의식을 잃으면 보통 휴대전화를 임의로 열어 가족이나 지인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는데,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역시 불법”이라며 “어떤 조치까지 취할 수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지자체·의료기관 적극 협업 필요”… 경찰청, 개선안 논의

주취자 대응 업무를 경찰에만 맡겨둬선 안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현재 (보호조치) 매뉴얼은 세세한 상황이 나와있지 않고 대강의 방향성만 설정해둔 것이기에, 현장 경찰관들의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지역 주민들의 안전·복지에 관련한 업무이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가 지금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곽 교수는 “의료계의 경우 주취자 응급의료센터로 인한 업무 과중을 호소하는데, 전화나 영상 정보를 통해 주취자의 상태를 판단하거나 간호사 등과 협조하는 방안도 있다”며 “지자체가 중심이 돼 경찰 및 의료기관과 3자간 협의체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경찰도 문제를 인지하고 대응에 나섰다. 내부 전담팀을 꾸려 지자체 및 소방당국 등과 주취자 보호조치 개선안을 논의하고 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지난 6일 기자 간담회에서 “치안상황관리관을 팀장으로 직원과 외부 전문가를 모셔 TF를 만들었다”며 “가급적 빠른 시일 내 대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