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공작원과 비밀 이메일로 연락
"(박근혜 대통령) 탄핵까지는 쉼 없이 달려왔는데 주춤하네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회합·통신 및 편의 제공)로 재판에 넘겨진 전북민중행동 하연호(70) 공동상임대표가 2016년 12월 20일 북한 문화교류국 소속 대남 공작원 A씨(60대)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하 대표는 "지금의 주 구호는 박근혜 정부 정책 폐기(사드·위안부·국정교과서·성과연봉제 등)와 내각 총사퇴로 압박하는 게 좋다는 거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2017년 4월 4일에는 "담(다음)은 정말 제대로 된 정부를 세워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데 진보 진영이 분열돼 안타깝네요"라며 "4월 6일엔 평창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응원하러 가요. 남북 경기인데 북을 응원해야겠지요"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작성했다. 이 메일 내용은 검찰 공소장에 나와 있다.
하연호 "北 공작원인 줄 몰랐다"
전주지검은 지난달 20일 하 대표를 불구속 기소했다. 하 대표는 2013년 3월부터 2019년 11월까지 북한 공작원 A씨와 베트남 하노이와 중국 베이징·창사(長沙)·장자제(張家界) 등에서 최소 5차례 이상 만나고, 이메일 등으로 80여 차례 회합 일정을 조율하고 국내 주요 정세·동향 등을 보고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은 지난해 11월 9일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하 대표 자택·차량·휴대전화 등을 압수수색하면서 불거졌다. 같은 날 제주·경남 등에서 활동하는 진보·통일 인사 7명도 국보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했다.
전북민중행동은 "정권 위기 모면용 공안 수사"라고 반발했다. 하 대표는 "A씨를 만난 건 맞지만, 북한 공작원인 줄 몰랐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겉으론 회사 대표…실체는 대남 공작원"
11일 국민의힘 조수진 국회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공소장에 따르면 A씨는 표면적으로는 모 회사 베트남 지사 대표지만, 실상은 베트남 주재 북한대사관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는 거물 공작원이다.
1970년대 후반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한 A씨는 1980년대 초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됐다. 이후 1998년 중국인 명의로 위조 여권을 발급받아 1998년 11월부터 2006년 5월까지 15차례 한국을 다녀갔다.
A씨가 속한 문화교류국은 한국 정·관계 등 각계각층 인사를 포섭해 지하당 조직을 구축,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한 조직이다. 국가 기밀 탐지·수집, 북한 체제 우월성 선전, 요인 암살·테러 등이 임무다.
"하연호, 정보력·영향력 상당…北 9차례 방문"
하 대표가 속한 전북민중행동은 적폐 청산 등을 내세우며 전북 지역 27개 진보 단체가 2019년 5월 결성했다.
검찰에 따르면 하 대표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을 반대하는 시위 등을 주도하다가 1993년 10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04년과 2008년 국회의원 선거 때 김제·완주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연거푸 낙선했다. 2010년 전북지사 선거도 떨어졌다.
하 대표는 북한도 9차례 방문했다. 2003년 8월부터 2008년 9월까지 한미FTA저지 전북도민운동본부 상임대표와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자격으로다.
"강성대국 건설 믿어" 김정은에 축전 보내기도
하 대표가 A씨와 연락을 주고받은 건 2007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소장엔 두 사람 교신 방법이 나온다. 하 대표는 A씨가 한국인 명의를 도용해 만든 이메일 계정과 외국계 이메일 등을 활용해 A씨와 연락했다.
이른바 인터넷상 비밀 매설지를 뜻하는 '사이버 드보크(Cyber Dvok)'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유해 교신하는 신종 연락 수단이다.
A씨는 '사이버 드보크'를 통해 하 대표에게 국내 정세와 시민사회단체 동향 등을 물었다. 하 대표는 그때마다 "국정원 문제를 전북에서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간담회(를) 하기로 했네요"(2013년 6월), "어제는 오전에 한미군사훈련(UFG) 반대 기자회견을 전북도청 앞에서 하고"(2013년 8월) 등의 이메일을 남겼다.
하 대표는 2012년 11월 21일 A씨에게 김정은 집권 1주년 축전 작성 요청을 받고 '강성대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라고 썼다. 앞서 2010년 전북지사 선거에 출마한 하 대표는 그해 4월 친동생을 중국에 보내 A씨로부터 선거 승리 전략과 상부 격려 내용 등이 담긴 USB(이동형 데이터 저장 장치)를 받아 오게 했다.
하 대표 "미국은 가치 없는 나라"
미국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드러냈다. 하 대표는 2013년 5월 "제국주의 세력들은 언제나 이 땅에서 물러갈지", 2016년 7월 "사드 배치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왔다. 미국, 정말 있어야 할 가치가 없는 나라" 등의 이메일을 작성했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직전인 2016년 11월엔 "전주뿐 아니라 익산·군산·김제·정읍·남원에서도 촛불이 켜지고 있고, 검찰청을 포클레인으로 부순 사람도 전북 임실(사람)이고 시내버스 경적으로 함께한 전주 시내버스 노동자들도 민주노총 산하 조합원들"이라며 "텔레그램에 사진을 올리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해외 접선 일정도 '사이버 드보크'로 조율했다. 하 대표가 '농번기에 보면 좋겠네요'라고 이메일을 작성하면, A씨가 '피서 가야죠. 베트남도 괜찮다네요' '제가 마중할게요'라고 다시 이메일을 남기는 식이다.
해외 회합 일정도 이메일로 조율…007 작전 방불
이런 식으로 하 대표는 2013년 8월 26일~27일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호텔 등에서 A씨와 접선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 만남은 첩보 영화에 나오는 '007 작전'을 방불케 했다.
하 대표는 베트남 입국 첫날 오후 1시9분쯤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발견한 A씨를 따라 이동하다 택시 승강장 인근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웠다. 이후 오후 1시14분쯤 택시에 혼자 탄 뒤 하노이 시내 한 마트에서 내려 정체불명의 남성을 만났다. 하 대표와 A씨는 비슷한 시각 같은 호텔, 다른 객실로 들어갔다가 오후 9시11분쯤 호텔 후문으로 나와 함께 택시를 타고 다른 호텔로 갔다.
방첩 당국 "공작원인 줄 알고 정보 줘"
하 대표는 비슷한 방식으로 2016년 5월 12일~13일, 2017년 8월 28일~29일 중국 여러 도시에서 A씨를 비밀리에 만났다. 2019년 11월 4일~8일엔 부인과 함께 중국을 여행하면서 6일과 7일 가무(歌舞)극장 인근과 식당에서 A씨를 따로 접선했다.
방첩 당국은 하 대표가 A씨가 대남 공작원인 줄 알면서도 북한의 대남 전략 수립과 공작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줬다고 결론지었다. 검찰은 "하 대표가 작성한 이메일은 반미·자주, 평화협정 체결 등 북한 주장을 선전·선동하는 내용에 부합하거나 공작금 수수 방법, 스테가노그래피(암호화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보안 기술) 암호화 방법, 개인 홈페이지 내 비밀 댓글 작성 방법, 회합 후 귀국 보고 등에 관한 것이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