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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기준 악용하며 가해자를 ‘소비자’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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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호 21면

시장으로 간 성폭력

시장으로 간 성폭력

시장으로 간 성폭력
김보화 지음
휴머니스트

‘성범죄, 무죄로 만들어 드립니다.’ 이 책의 발단은 한 법무법인이 서울의 지하철역에 내걸었던 이런 투의 광고판이었다. 광고판은 여러 시민의 문제 제기로 철거됐지만, 저자는 이를 가해자 중심의 성범죄 전담법인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기억한다.

그에 따르면 성범죄 가해자 지원 시장은 2010년대 중반부터 형성돼 꾸준히 성장했다. 반성문·탄원서·근절서약서 등으로 구성된 감형용 패키지 상품이 등장하고, 감형 컨설팅과 반성문 대필 업체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젠더폭력연구소 소장인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성폭력 피해자·여성단체 활동가·변호사 등의 심층 인터뷰와 현장 연구를 진행했다. 성범죄 가해자 지원 산업의 등장, 산업 성장에 따른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 변화, 성폭력 담론의 재구성 과정 등을 여러 측면에서 살폈다. 이 책은 이렇게 나온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책에 따르면 성범죄 가해자 전담법인은 양형기준을 악용해 다양한 감형 전략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감형을 위한 반성. 반성을 명목으로 사회봉사단체나 여성단체에 후원금을 기부한 후 영수증을 법원에 제출하는 식이다. ‘사회적 유대관계 분명’이라는 성범죄 집행유예 기준에 착안해 가해자가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며 가족과 지인의 탄원서를 활용하기도 한다. 가해자 측이 재판부에 제출하는 자료는 봉사활동, 헌혈, 정신과 치료, 음주 치료, 고도비만 등 분야가 다양하다.

가해자 지원 시장의 거래는 성범죄 가해자를 법시장의 합리적인 소비자로 탈바꿈시킨다고 이 책은 지적한다. 가해자 전담법인의 전략에 따라 가해자는 피해자와 그의 가족·지인을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기도 한다. 이런 흐름에서 ‘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지’ 등 피해자에 책임을 묻는 새로운 피해자 담론이 등장하기도 한다. 저자는 성범죄 재판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지 못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경쟁하며 자본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투쟁의 과정으로 전락했다고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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