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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물 먹은 담벽처럼 무너진다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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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호 31면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한류의 엄청난 힘을 현장에서 경험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일본이었다. 특히 ‘욘사마’의 위력은 기대와 상식 그리고 상상을 초월했다. 새로운 용어들이 출현했다. ‘욘겔 지수’ ‘욘사마 이혼’…, 전자는 가계 지출 중 ‘겨울 연가’나 주연 배용준씨와 관련된 지출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욘사마에 관련된 부부사이의 이견이나 다툼이 파경에까지 이르는 경우를 뜻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이 드라마를 보고 일생 고생을 하던 만성 위궤양이나 관절염이 나았다는 소식들도 있었다. 주일대사 시절 대사관을 찾아온 중년 부인의 이야기는 특별했다. 이 분은 이 드라마를 보고 너무 감동해서 일생동안 남편 몰래 모은 돈 50만엔을 기탁하면서 한국 학생들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보고를 듣고는 나도 한동안 가슴이 뭉클했다. 별도의 수입이 없는 일본의 중산층 전업주부가 남편 몰래 가계에서 이 정도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을 터였다. 그리고 그 돈이 그 부인에게는 단순히 돈이 아니고 남이 모르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별 인연도 없는 나라의 장학금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 부인은 마음만을 받겠으니 돈은 도로 가져가시라는 교육관의 설득을 끝내 물리치고 기어이 돈을 놓고 갔다.

정작 나에게는 그 드라마가 별 감동이 없었다. 문제의 드라마를 보려고 해보았지만 노력을 해도 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청중이 주로 여자분들인 어느 강연회에서 ‘겨울 연가’처럼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드는 한국인의 정서와 감수성, 문화적 저력에 관한 질문이 나왔기에 나는 조금 다른 답을 했다. “나에게는 이 작품이 독특하게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아마도 오랜 기간에 걸처 한·일간에 이어져 온 교류의 결과 부지불식 간에 축적되고 공유된 정서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에게는 이것이 한국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의 연예물 같은 느낌이다”라는 답을 했다. 예기치 않은 답이었는지 청중석에서 한동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 받는 듯 웅성거리는 반응이 있었다.

이미자·김연자 보내달라던 북한
반동사상문화 유입에 가혹한 처벌
악영향만 낳을 뿐 실패할 수밖에
남북 활발한 교류로 함께 나가야

선데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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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예가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이다. 일본 내에서는 별로였지만 해외 특히 서방 세계에서는 오히려 일본적인 정서의 표현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연예계를 넘어 학계에서 ‘탈 근대 시대’를 열었다는 평까지 나왔다. 제작 다음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구로자와는 일본적인 유미주의의 틀을 벗어나 과감하게 존 포드나 윌리암 와일러 같은 감독들의 기법을 일본적 감성의 표현에 활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2차대전 이후 급격히 변하는 현실을 조명할 수 있는 시각을 열어 주었다. 구로자와 감독과 그가 만든 영화들은 해외 영화계 특히 미국의 서부 영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홍콩에서 우연히 송청 전시장에 갔다가 크게 실망을 했다. 전시된 물건들이 크기, 색깔, 심지어는 수량에서도 고려 청자보다 뛰어났다. 우리는 고려 청자가 우리의 고유한 성취라고 배워왔다. 견식이 없는 눈에 얼핏 고려 청자는 송청의 모방 같았다. 못난 생각을 일깨워 준것은 진짜 전문가의 저술들이다. 청자 수집가이며 전문가이기도 한 고드프리 곰퍼츠의 연구가 특히 그랬다. 그는 일정한 기간 동안 송청과 고려 청자를 비교하면서 ‘교류에 의한 풍요화(Interfertilizatin)’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송청의 출현 후 고려 도공들이 이를 모방한다. 그런데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기법들이 창출된다. 그 후에는 송의 도공들이 고려 청자의 기법을 모방한다. 역시 새로운 작품들이 나온다. 청자는 이 상호 모방의 과정을 통해서 발전한다.

2년 전 북한 정권은 ‘반동 사상 문화 배격법’을 제정했는데 놀랐다기보다 의아한 심경이다. 정녕 북한은 문화의 갈라파고스 섬인가. 평소 북한에 대하여 이해와 일정한 공감을 하는 분들까지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이런 입법을 하고 가혹한 처벌을 하는 것 자체가 정권의 실패를 노정하는 것이며 이런 시도는 더 심한 악영향을 낳을 뿐 실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남북의 지도층 인사들이 함께 모여 박수와 환호로 함께 즐기던 것도 처벌 대상인가? 정권의 핵심 인사들의 모임에서 즐겨 부르던 가요들은? 이미자, 김연자 등 보내달라고 부탁한 분들은 누구였는가? 정권의 공신들에게 수여하는 롤렉스 시계나 최고위층 부인들이 들고 있는 명품 가방은 그야말로 반 사회주의 반동 문화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장 기이한 것은 노동신문의 사설이다. 반동 문화가 유입되면 결국 나라가 “물 먹은 담벽처럼” 무너진다는 것이다. 노동당의 기관지가 스스로 체제의 약점을 이렇게 노출하고도 처벌 받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앞에 인용한 한류의 성공도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문화 분야에서 국제적인 교류와 협력의 장애가 되는 제약을 과감하게 철폐하였다. 그 결과는 해외 문화의 국내 시장 점유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남과 북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북한 주민들이 남한의 드라마 가요 등을 즐겨도 나라가 무너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내가 보장을 할 수 있다. 오히려 지금은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해묵은 적대관계를 허물고 함께 세계로 나가야 할 때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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