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같이 슬퍼하는 마음이 부처님 자비, 예수님 긍휼이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26호 29면

‘풀꽃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은 사진기자에게 “사진을 잘 찍으려면 찍히는 대상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존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나태주 시인은 사진기자에게 “사진을 잘 찍으려면 찍히는 대상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존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풀꽃시인’ 나태주를 ‘국민시인’ 반열에 올려놓은 시 ‘풀꽃’의 전문이다. 서울 교보빌딩의 ‘광화문 글판’에 걸리면서 국민 애송시가 됐다. 지난 10년 동안 광화문 글판을 장식한 70여 편 중에서 가장 사랑받은 시가 풀꽃이다. 1971년에 등단한 나태주 시인은 시집만 50권을 냈다.

나태주의 시는 짧지만 깊고, 쉽지만 가볍지 않다. 울고 있는 친구에게 조용히 뽑아주는 티슈 한 장이고, 야단맞은 동료에게 힘내라고 보내는 이모티콘이다. “시가 밥 먹여주냐”고 묻는 세상을 향해 “영혼의 허기를 채워준다”고 답한다.

서울에 눈바람이 몰아친 날, 우리는 시의 효용과 시인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더 들어야 할 말이 많아서, 나는 주말에 나태주풀꽃문학관이 있는 공주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슬픔 함께하는 마음’ 표현하는 게 시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떤가요.
“밤 8~9시에 잠들어서 두세 시간 자고 일어나 자정 전후부터 서너 시간 글을 씁니다. 그리고 다시 잠자리에 들어서 9시 정도에 깨죠. 동네 한 바퀴 돌고, 청소하고, 아침 먹고, 외부 일정이 없으면 풀꽃문학관으로 나갑니다. 출판사에서 사인해 달라는 책들이 쌓여 있어서 제 시구 하나씩 쓰고 사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꽤 됩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시를 쓰시는가요.
“아니요. 산문을 씁니다. 시는 작정하고 쓸 수가 없어요. 시의 속성은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거니까요. 우리가 고흐의 그림에 끌리는 게 그거예요. 그 그림이 인상파하고 표현주의 사이에 들어 있잖아요. 인상파는 보이는 대로, 표현주의는 자기 느낌을 집어넣어서 그리는데, 고흐는 그 두 개를 같이 했죠. 급하면 캔버스에 물감을 바로 짜고 색칠해서 그림이 거칠어요. 제가 제일 끌리는 화가는 고흐와 미국의 마크 로스코인데요. 로스코는 감성에서 더 들어가서 영성을 얘기했어요. 시인도 영성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광화문 글판 ‘풀꽃’

광화문 글판 ‘풀꽃’

어떤 의미인가요.
“이성 안에 있는 게 감성이고, 그 안에 있는 게 영성 같아요. 영성에 가까워지려면 이성을 뚫고 들어가서 감성을 통과해야 합니다. 현대 도시 사회일수록 영성이나 감성보다 이성으로만 살아가는 것 같아요. 시는 내가 쓰는 게 아니고 시 자체가 쓰는 거예요. 시가 나를 콱 쥐어박으면서 ‘써, 빨리’ 하고 공격하는 거죠. 산문은 주도권이 작가한테 있고, 시는 시 자체한테 있다는 얘깁니다.”
예를 좀 들어주시죠.
“정현종의 ‘섬’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가 끝입니다. 매우 비논리적인 시죠. 그런데 이성이 아니라 감성과 영성을 갖다 대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정 선생의 ‘방문객’도 그렇죠.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중략)/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까지는 이성적인 접근이에요. 마지막은 ‘필경은 환대가 될 것이다’죠. 사람들은 ‘저게 뭐야’ 하는데 그게 핵심입니다. 좋은 시에는 환대가 있어요. 반갑고 고맙고 기쁜 것. 환대 없이는 좋은 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저는 대학 때 정현종 선생님한테 배웠는데 시를 잘 못 쓰겠더라고요.
“미치지 않아서 그래요. 제대로 된 시인은 자기 딸이나 아들한테 시 쓰라고 안 합니다. ‘너, 나 따라서 미쳐라’ 그 소리거든요. 그런데 시는 내 편만 보고 미치는 게 아니라 네 편을 보고도 미치는 거예요. 함께 미치는 거죠. 거기에서 감동과 소통, 공감이 나옵니다. 내 편만 보고 미치면 더럽게 미치는 거고, 그건 자위 아니면 자해예요. 공자님이 말씀하신 충서(忠恕)를 새겨야 합니다.”

시인의 말은 고흐를 넘어 공자님께로 넘실거리며 나아갔다.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충서의 뜻을 물었다. “충(忠)은 나한테 충실한 거고 서(恕·용서할 서)는 남을 받들고 용서해 주고 풀어주는 거예요. 오늘날 충만 남아 있는, 나한테만 집중하고 나한테만 빠져 있는 모습입니다. 학교 교육이 영성을 버리고 감성 조금 넣고 이성만 배불뚝이가 돼 버렸어요. 이성을 발달시켜 남 위에 군림하면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라는 거예요. 시인은 영성과 감성 쪽으로 가니까 이성 쪽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미치거나 쓸모없는 얘기 한다고 하죠.”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이 가을에’)고 쓰셨죠.
“사랑하면 슬퍼집니다. 슬프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우리 어머니들은 슬퍼요. 왜냐하면 자식을 사랑하니까. 더 못 줘서, 더 같이 못 있어서 슬픈 거예요. 부처님의 자비는 사랑(慈)과 슬픔(悲)이 합쳐진 겁니다. 타인의 슬픔에 같이 슬퍼하는 게 부처님 마음입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지만 이 부처님한테 무릎을 꿇어요. ‘부처님 너무 많이 슬퍼하지 마세요. 너무 많이 사랑하지 마세요’라면서요.”
예수님과 공자님도 그런 마음이 있잖습니까.
“공자님의 인(仁)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안쓰럽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긍휼(矜恤·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입니다. 한자 휼(恤)은 마음(心)과 피(血)를 합친 글자죠. 세상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보며 마음으로 피 흘리는 게 예수님 마음이고, 끝내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잖아요. ‘슬픔을 함께하는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게 시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시는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데요.
“요즘 애들은 ‘나’하고 ‘오늘’에 치중해요. 옛날 사람은 주변 상황에 치중하고 내일에 투자를 했어요. 오늘 사람들은 급합니다. 그래서 기념을 하지요. 그건 참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봐요. 얼마나 똑똑해요. 20~30대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 나는 그냥 먹는데 저들은 먹기 전에 찍어요.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나태주 ‘오늘’) 라는 걸 뼈저리게 받아들이고 그 선물을 매 순간 뜯어보는, 요즘 말로 언박싱 하는 거죠.”
“시를 너무 어렵게 써서 안 팔린다”고 하셨는데요.
“좋은 시는 누구나 아는 쉬운 언어와 기술 방법으로, 누구나 경험하는 주변의 흔한 것을 대상으로 쓰되, 발견을 해서 써야 합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부력의 법칙)’도, 뉴턴의 만유인력도 발명이 아니라 발견한 거잖아요. 시도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시의 전범을 찾는다면?
“김소월과 윤동주죠.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김소월 ‘진달래꽃’)에는 발견이 있어요. 이별은 아프고, 아프면 눈물 나는 건 당연지사죠. 그런데 소월은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울면서도 안 운다고 하는 이의 마음을 발견한 거죠. 윤동주는 문어체가 지배하던 시대에 엄마 말로, 입말로 시를 썼어요. 윤동주를 떠올리면 ‘아주 좋은 비누로 머리를 감고, 말리지도 못한 채 연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오는’ 청년의 느낌을 받아요.”

시는 주변에 있는 것 발견, 쉽게 써야

충남 공주시에 있는 나태주풀꽃문학관. 매일 수십 명이 찾아온다. [중앙포토]

충남 공주시에 있는 나태주풀꽃문학관. 매일 수십 명이 찾아온다. [중앙포토]

나태주 시인이 지난해 낸 산문집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는 여섯 달 만에 10만부 가까이 팔렸다. 그만큼 위로에 목마른 시대다.
“‘당신은 지금도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세요’라는 메시지에서 앞부분을 뺐는데도 사람들이 놀랍게도 다 알아요”라고 그는 말했다. 책을 읽은 진보와 보수 성향 국회의원들이 똑같이 “맞아, 이거 내 얘기네” 하더라는 거다. 시인은 “너무 잘하려고 애쓰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뜻이죠. 근데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요. 너무 내편한테만 잘하려고 하니까요. 그래서 중간, 조화, 중도가 필요한 거죠”라고 해석했다.
“집토끼·산토끼만 있는 게 아니라 들토끼도 있다”고 하셨죠.
“제가 바로 들토끼입니다. 집토끼한테 있는 안정적인 울타리가 부럽기도 하고 산토끼의 야성과 자유가 좋아 보이기도 하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들토끼를 기회주의자라고 규정하면 안 돼요. 동물의 세계든 사람 사이에서든 중간 지대는 넓을수록 좋아요.”
시도 너무 잘 쓰려고 애쓰면 안 되겠죠?
“개구리가 준비체조 하고 물에 뛰어드는 거 봤어요(웃음)? 느낌과 충동이 올라오면 그냥 써야 해요. 뒤늦게 한글을 배운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쓴 시를 보고 큰 감동을 느꼈어요. ‘영감아 땡감아/왜 이렇게 빨리 떨어졌어/지금까지 있었더라면/내가 잘해줄 텐데’ 일찍 떠난 영감을 감나무에서 떨어진 땡감과 연결했어요. 이런 게 시죠.”

풀꽃문학관을 내려오면 나태주 시인의 집이 나오고,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눈썹달’이라는 찻집이 있다. 우리는 시를 쓰는 주인장이 내린 커피를 마셨다. 시인은 ‘행복 연습’을 이야기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에요. 나도 천사가 아니고 앞에 앉아 있는 집사람도 천사가 아니에요. 근데 자꾸 천사라고 생각을 해야만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중요하죠. 지금 망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깨진 거울을 다시 붙여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야죠. 그래야 살기라도 하지요.”

나태주. 1945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43년간 초등학교 교단에 섰다.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산문집, 동화집 등 150권이 넘는 저서를 출간했다. 한국시인협회장, 공주문화원장을 역임했고, 2014년부터는 나태주풀꽃문학관을 운영하면서 풀꽃문학상·해외풀꽃시인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