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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가 키운 린뱌오의 팔로군, 일본군 1000명 몰살시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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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3〉

동북에서 국·공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이 마샬(오른쪽 다섯째) 원수를 특사로 파견해 조정에 나섰다. 오른쪽 여섯째가 국민당 대표 장츠중(張治中), 오른쪽 넷째와 셋째는 중공 대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예젠잉(葉劍英). 1946년 12월 20일 장자커우(張家口). [사진 김명호]

동북에서 국·공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이 마샬(오른쪽 다섯째) 원수를 특사로 파견해 조정에 나섰다. 오른쪽 여섯째가 국민당 대표 장츠중(張治中), 오른쪽 넷째와 셋째는 중공 대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예젠잉(葉劍英). 1946년 12월 20일 장자커우(張家口). [사진 김명호]

흔히들 말한다. “쓰예(第四野戰軍)는 중국 역사상 최강의 부대였다. 수천 년간,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이런 군대는 없었다. 군가도 다른 야전군과 달랐다. 첫 구절이 ‘우리는 린뱌오(林彪·임표)의 전사들’이었다. 마오쩌둥의 이름 석 자 중 한 글자도 들어갈 틈이 없었다.” 맞는 말이다. 쓰예의 전신 ‘동북야전군(東北野戰軍)’은 1948년 총공세를 펼친 지 52일 만에 동북 전역에 붉은 깃발을 날렸다. 국민당 군에 밀리던 전세도 3년 만에 역전시켰다.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화북야전군(華北野戰軍)과 함께 톈진(天津)을 점령하고 베이징(당시는 베이핑)에 입성했다. 여세를 몰아 우한(武漢)을 삼키고 강남(江南)과 광시(廣西)를 평정한 후 하이난다오(海南島)의 국민당 요새를 깨버렸다.

스탈린, 동북 지배권 미국 묵인이라 착각

동북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에서 린뱌오에게 패한 두위밍(앞줄 가운데)의 버마 원정군 시절. [사진 김명호]

동북에서 벌어진 첫 번째 전투에서 린뱌오에게 패한 두위밍(앞줄 가운데)의 버마 원정군 시절. [사진 김명호]

미군 장비로 무장한 국민당 군은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동북야전군에게 연전연패(連戰連敗)했다. 기점은 1945년 항일전쟁 승리 전야였다. 소련군이 동북을 점령하자 중국의 양대 정치권력 국민당과 공산당(중공)은 처신에 골몰했다. 집권 국민당은 중공 척결이 시급했다. 군사력이 중공의 3배였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내전을 결심했다.

마오쩌둥이 이끌던 중공은 8년간 국민당과 연합해 일본에 대항했다. 온갖 지원 받으며 위험한 전투는 요리 빠지고 조리 빠졌다. 효과가 기대 이상이었다. 일본이 항복할 무렵 병력이 100만명을 웃돌 정도로 증가했다. 그래도 마오는 한숨을 거두지 못했다. 국민당과 자웅을 겨루기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방향 설정에 고심했다. 소련이 동북에 진주하자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함박웃음이 터졌다. 부주석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와 차를 마시며 희희낙락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미국과 소련의 모순이 고조된다. 동북을 점령한 소련의 중공 지지는 필연이다. 동북은 아주(亞洲)에서 경제가 가장 단단한 지역이다. 공업생산량이 전 중국의 85%에 달한다. 현대화된 도시가 즐비하고 교통도 발달했다.”

마오쩌둥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탈린이 장제스와 우호조약 체결하자 안색이 일그러졌다. 소련에서 돌아와 산책만 즐기는 린뱌오를 불렀다. “네 사색의 결과가 궁금하다.” 린뱌오가 입을 열었다. “현재 중국은 미국의 세력권이나 다름없다. 몇 개월 전 얄타에서 루스벨트는 전쟁의 조속한 완결을 위해 스탈린에게 동북출병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러·일 전쟁 이전 러시아가 동북에서 누렸던 이권을 회복하고 싶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의 값비싼 요구에 동의했다. 단, 중국의 내전 발생 저지를 위해 스탈린에게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지지하고 중공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동북을 소련의 지배권에 두는 것을 미국이 묵인하겠다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장제스는 굴욕을 감수하고 동북의 이권을 소련에 양보하는 대신 스탈린의 국민당 지지를 보장받았다. 동북에 진출해 소련의 지원 받으며 근거지 마련하겠다는 우리의 계획은 수정해야 한다. 장제스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다. 스탈린도 레닌이 표방한 국제주의를 포기했다. 동북문제는 중국인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전쟁 외에는 방법이 없다. 우리는 소련을 어떻게 이용할지에 골몰해야 한다. 장제스의 생각도 우리와 별 차이 없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스탈린이 린뱌오를 탐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얘기는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 9월, 30세 생일을 앞둔 팔로군 사단장 린은 8세 연상의 부사단장 네룽전(聶榮臻·섭영진)과 함께 핑싱관(平型關)에서 일본군 1000여 명을 몰살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국민당과 중공을 통틀어 중국이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전시수도 충칭(重慶)에 있던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교장 시절 자신의 손으로 키워낸 린뱌오의 쾌거에 흡족했다. 군관학교 1기생 두위밍(杜聿明·두율명)과 후쫑난(胡宗南·호종남)을 불렀다. 포도주로 린뱌오의 승리 축하하며 덕담한다는 것이 두 측근을 당황하게 하였다. “린뱌오는 4기 출신이다. 후배 교육 잘 한 덕에 황푸의 명예가 솟아올랐다. 선배가 뒤지지 않도록 분발해라.” 린은 환호에 들뜨지 않았다. 어둠이 드리우자 영롱한 달빛이 청년 장군을 유혹했다. 일본군에게 노획한 코트 걸치고 산책하러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암구호 묻는 초병에게 우물거리다 총을 맞고 쓰러졌다. 치료차 소련에 가 있는 동안 스탈린의 눈에 들었다. “소련에 귀화해 나를 도와 달라”는 청을 거절하고 4년 만에 귀국했다.

전쟁 영웅 린뱌오 뜨면, 여학생들 몰려와

충칭에서 중공 원로 둥비우(董必武. 오른쪽 첫째), 저우언라이(오른쪽 둘째)와 함께 국민당 요원과 환담하는 린뱌오(오른쪽 셋째). 왼쪽 둘째는 훗날 신중국 초대 외교부 정보국장 궁펑(龔澎). [사진 김명호]

충칭에서 중공 원로 둥비우(董必武. 오른쪽 첫째), 저우언라이(오른쪽 둘째)와 함께 국민당 요원과 환담하는 린뱌오(오른쪽 셋째). 왼쪽 둘째는 훗날 신중국 초대 외교부 정보국장 궁펑(龔澎). [사진 김명호]

귀국 도중 충칭의 ‘중공 연락사무소’에 머무는 동안 마오쩌둥의 특사 자격으로 장제스와 회담했다. 장은 린뱌오가 자신을 어떻게 부를지 궁금했다. 군복 차림에 부동자세로 거수경례하며 한마디로 근엄한 장제스를 녹여버렸다. “학생 린뱌오 교장께 인사 올립니다.” 장이 각료들에게 당부했다. “린뱌오가 충칭에 있는 동안 자주 찾아가라. 황푸가 배출한 인재다. 배울 것이 많다.”

마오쩌둥은 의심이 많았다. 린뱌오를 장제스에게 뺏기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했다. “즉시 옌안에 와서 요양에 힘쓰라”는 전문을 보냈다. 린뱌오도 의심 많기로는 마오나 장 못지않았지만 마오는 예외였다. 말만 떨어지면 무조건 승복했다. 옌안에 돌아온 린뱌오는 의외였다. 마오쩌둥이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독서와 산책으로 소일했다. 심심하면 터덜터덜 ‘항일군정대학’으로 갔다. 여학생들과 잡담하며 시간을 보냈다. 핑싱관 전투 이후 전과(戰果)가 없어도 전쟁 영웅 린뱌오의 명성은 여전했다. 나타나기만 하면 여학생들이 떼로 몰려왔다.

전쟁이 끝나자 마오쩌둥이 린뱌오를 불렀다. 장제스도 애장 두위밍을 호출했다. 동북에 화약 냄새가 진동할 징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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